'여행'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17.04.10 광저우 육조사에서 여래를 보다. (1)
  2. 2016.08.12 조선시대 냉장고 누가 사용했을까?
  3. 2016.08.09 고려종택 네모주춧돌과 둥근기둥의 음양조화는 과연?
  4. 2016.08.05 아라홍련은 여인의 화생인가, 꽃의 화생인가?
  5. 2016.08.03 경치도 무진장, 즐거움도 무진장한 함안의 무진정.

  함안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서산사의 원담스님께서 중국 광저우 육조사에 간다고 동행하자고 강권을 하여 320일부터 24일까지 45일간 다녀왔습니다.

  2012년 거창 가북면에 있는 용암선원에서 석달간의 동안거 이후로 나는 꾸준히 참나(眞我)를 찾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고로 석가모니 이후로 마음세계를 가장 잘 설파한 육조스님의 흔적을 스님들과 함께 구경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마음을 내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육조혜능(六祖惠能) 대사하면 인도에서 28대 조사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동양 1대 조사가 된 후로부터 6번째 조사로 불가에서 교과서인 육조단경이 대사의 어록입니다.

  대사는 일자무식으로 나무장사를 했는데 하루는 객점에 나무를 져다주고 문 밖을 나오는 순간에 한 손님이 마땅히 머무름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열려 깨닫고는 오조홍인(五祖弘忍)대사를 찾아가 탁마를 하여 법을 이어 받았습니다.

  흔히 불교의 선가에서는 오직 선()수행을 통해서만 정()에 들 수 있으며, 정에 들어서야 비로소 해탈을 한다고 하는데 육조스님이 깨달은 경위와 법 설한 바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은 자기 마음이 곧 부처요 불법이며, 자기 마음을 알면 곧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설한 법문을 보면 불가사의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설산에서 6년 고행 끝에 깨닫고 삼칠일(21일간)을 고심하고 고심하다가 깨달은 경지를 입으로 말하는 것이 차라리 열반에 드는 것 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 경지는 신비하고 오묘하여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해서 불법의 진리는 하나지만 사람 사람마다 근기에 따라 깨닫기 쉽도록 팔만사천가지로 법을 펼쳐 보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된 스님네들은 평생토록 경전을 읽고 외웁니다만 대부분의 스님들이 골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중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육조스님은 글자를 모르므로 경전을 읽은 바도 없고 나무꾼과 사냥꾼 노릇만 하였기에 다른 승려들처럼 경전을 들을 기회도 없었지만 한 순간 자기마음(自心)을 깨닫고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육조스님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많은 승려들이 자신들이 공부한 경전에 대해 그 뜻을 물을 때면 스님은 묻는 이에게 자신은 글을 모르니 경전을 읽어보라고 합니다. 그러곤 답을 하는데 그 답은 실로 글 모르는 무식꾼이 뱉는 말과는 천리만리나 떨어져 있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법을 설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섭에게 법을 전하면서 불법은 이심전심의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육조혜능대사에게 딱 어울리는 말인 것 같습니다.

  서쪽 인도의 석가모니 마음이 동쪽 중국의 육조혜능선사에게 맞닿았다고 할까요.

 

 

 

 그럼 320일부터 324일까지 45일의 육조사 기행을 보겠습니다.

 

  첫날 육조사 대원(大願) 방장스님을 방문합니다.

  방장스님의 표정을 유심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눈동자와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이 잔잔한 미소만  흐르는 그 모습에 누구나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적어도 도를 닦는 스님이라면 저 정도는 되야지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나게 합니다.

 

 

 

 

 

대원 방장스님이십니다.

 이 분의 모습만 보고 있어도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지고 환희심이 생겨나는데 나만 그런가 했는데 동행한 이들 모두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육조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중국의 절에서는 호텔, 식당, 오락실, 야외수영장 등 돈 되는 속가의 사업을 다 합니다. 우리 일행은 이틀간 이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이틀간의 숙박과 식사, 그리고 가사, 장삼을 포함한 다소의 선물을 육조사에서 지원한다고 하네요.  

 

식당의 규모에 입이 벌어집니다.

 

야외수영장인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 휴업 중이네요.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 때문에 호텔에서 식당까지 가는 길은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남은 빵이나 만두를 연못에 던지자 잉어와 메기가 몰려 듭니다.

 

진흜 속에서 핀 연꽃이 아름답듯

고달픈 삶 속에서도 웃음을 피워내는 서민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호텔의 청소부들이지 싶은데 점심도시락을 먹고 자투리 시간에 나름의 낙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육조사를 방문한 스님네들이 남긴 작품 전시장이 있는데 동행한 스님들네들도.....

 

   내게 육조사 동행을 권한 원담스님과 인터넷 불교방송을 하는 거목스님의 달마상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달마를 그려도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닮은 달마상을 그린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자화상인 셈이죠. ㅎㅎㅎ

 

 

 

 

 

 

 

 

 

 

 

  컵을 들고 계신 분이 나와 나흘간 룸메이트를 한 도경스님인데 몇번의 큰 사고로 정신이 깜박깜박하여 한국에서 갖은 심혈을 기울여 미리 글을 쓰서 방장스님께 선물 했는데 방장스님이 그 정성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정성이 깃들인 선물이라며 특별히 감사의 답례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

 여기서도 이심전심은 통했는가 봅니다. ㅎㅎㅎ

 

 

 새로이 불사를 하고 있는 스님들께 방장스님이 선물한 현판글체입니다.

 절이 완공되면 이 글체가 현판으로 떡하니  붙겠죠...

 

 

 

 

 

  이틑날 오후 부처님의 법을 전한다는 전법계를 받습니다.

  예로부터 불가에서 전법계를 전하는 증표료 가사장삼과 발우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날 대원 방장스님이 손수 가사장삼을 입혀주었는데 의복의 문양과 색상에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 같은 속가의 사람은 밤색입니다. 

 

 

 

 

 

 

 

 

 

 

 

 

사흘째 육조스님이 처음 삭발한 머리카락을 보관한 탑이 있는 광효사를 방문합니다...

 

 

 

 

이 건물의 지붕 모양은 중국의 여느 건물과는 달리 우리나라 전통한옥의 지붕모양인 점이 특이합니다.

 

바깥 담장에는 한문의 글귀가 쭈욱 있는데 아마도 육조스님의 법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은 대불사라는 절인데 광저우 시내에서도 땅값이 가장  비싼지역에 떡하니 불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절들이 모두 산중에 있는데 비해 중국의 절들은 시가지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제자 오백나한의 상을 모신 화림선사(華林禪寺)입니다.

  오백의 나한 상이 그양말로 천차만별입니다.

 

 

 

 

 

 

 

 

 

머리에 염색을 한 젊은이가 정성스례 에배를 올립니다.

중국에서는 이같이 젊은 불교신자가 많다는 점도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절 뒷문으로 나오니 온갖 옥이 다 모인 시장이 있습니다.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합니다.

 

 

 육조사에서는 육조단경을 12개국어로 번역하여 방문객에게 선물로 주는데 이날 인솔자가 방장스님께 내가 육조단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자 방장스님은 특별히 자필로 돈오성불(담박 깨달아 부처를 이루다)이라 적고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는 한국에서 가져간 육조단경 책을 가이드한테 선물했더니 매우 좋아라 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4박5일간 우리를 성심으로 안내해준 가이드 젊은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행기간 동안 내가 깨달은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여행 사흘째 밤에 스님과 스님을 공양하는 보살님 두 분, 그리고 나 셋이서 가볍게 곡차를 한 잔 했습니다. 그 자리서 노보살님께서 이번 여행 동안에 스님들한테서 못 볼 것을 많이 봤다고 하자 스님께서는 나쁜 모습은 마음에 담지를 말고 못 본 것으로 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보살님은 어찌 눈에 보이는데 못 본 것으로 할 수 있냐며 한참을 논쟁하는 가운데 나는 문득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본다.’라는 경구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스님의 모습선생님의 모습, 부모의 모습 등등에 대하여 어떤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상에서 벗어나면 그 사람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상은 상대방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입니다. 자기가 만든 상 안에 상대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상대를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우리가 역설적으로 너는 자신을 버리고 상대방이 만들어 놓은 상에 너를 맞출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라도 불가하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가 자기 본래의 진면목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본래의 진면목은 보지 못하고 자신의 선입견에 가려진 상을 보고 그 상이 상대방의 진짜 모습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목마르면 물을 찾고 배고프면 밥을 찾는 사람의 마음,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오해도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밥이나 먹자!!!!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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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8.12.30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혜능대사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서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로 창녕의 유적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는데 창녕에 이렇게 많은 유적이 있는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창녕지석묘, 교동·송현고분군, 진흥왕 척경비, 석빙고 . . .

 

 오늘은 그 중에서도 석빙고와 선정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본래 선정비(또는 공덕비라고도 함)는 그 고을을 다스리던 목민관이 특별히 공과 덕을 많이 쌓아 백성들이 그 은공에 감사의 표시로 세웠던 비석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임기가 끝나고 떠나는 공직자에게 주민들이 주는 감사패와 같은 것으로 요즘의 감사패는 돈 몇 푼 주고 뚝딱 만들어서 손에 쥐어주면 되는 것이지만 당시의 선정비는 돌이나 철로 만든 부피가 큰 물건이라서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도 아닐뿐더러 비를 세우는 장소도 확보해야 하므로 지금의 감사패와는 무게감이 확연히 다릅니다.

 

 백성들이 어려운 살림에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돈은 내거나 노역을 제공하여 비석을 세울 정도면 웬만한 은공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창원 진동면사무소와 창녕 만옥정공원에 세워진 선정비를 보면 2~3년 재임하고 간 목민관들의 선정비가 줄줄이 세워져 있는데 해딴에 김훤주 대표의 설명에 의하면 처음에는 임기가 끝나고 간 목민관을 기리기 위한 비였는데 언제부턴가는 부임해 오는 목민관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미리 선정비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 만옥정공원에 있는 선정비 중에는 일제시대에 군수를 역임한 군수의 선정비도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않고서는 공직에 나아갈 수가 없는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과연 그들이 백성들에게 어떤 선정을 베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만옥정 공원에 모아놓은는 선정비들

-위 사진은 실비단안개님 꺼-

 

 다음은 석빙고를 보겠습니다.

 석빙고는 밀양의 얼음골처럼 자연의 현상에 의해 얼음이 절로 만들어지거나 지금의 냉장고처럼 기계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강이나 저수지 얼음을 떼어 내어 여름까지 보관하는 얼음창고입니다.

 

 석빙고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창고.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때부터 있었고, 이 일을 맡아보는 관청은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의 유구(遺構)도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빙제도(藏氷祭度)가 있어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빙고(氷庫)라는 직제를 두어 5품 제조(提調) 이하의 많은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다.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는 서울의 한강북쪽 연안에 설치되었던 얼음창고인데, 석조가 아닌 목조로 된 빙고였기 때문에 내구성이 적어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 보물 제66안동 석빙고(安東 石氷庫, 보물 제305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 보물 제310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달성 현풍 석빙고(達城 玄風 石氷庫, 보물 제673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보물 제1739해주 석빙고(海州 石氷庫, 북한 국보 제69) 등이 있다.

 

석빙고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천장에 1~2m의 간격의 4~5개의 홍예(虹霓)라 부르는 아치를 만들고 그 사이가 움푹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사이에 더운 공기가 갇히고 위쪽의 환기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게 된다.

 

빗물을 막기 위해 봉토를 조성할 때 진흙과 석회로 방수층을 만들었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왕겨, 밀짚, 톱밥 등의 단열재를 채워 외부 열기를 차단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도록 했다.

 

빙고 외부의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로 인한 열 손실을 막고, 외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여 외기를 차단했다. 그리고 2~3곳의 환기구를 만들어 외부 공기와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봉토 바깥까지 구조물이 나오게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전국의 석빙고 7개 중 두 개가 창녕에 있는데 이를 두고 해석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창녕이 먹고살만한 부자동네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가렴주구 목민관이 많아서였는지...

 

 

 석빙고와 관련 조선시대 김창협(金昌協, 1651~17080)이라는 한 선비의 착빙행( 鑿氷行)이라는 한 시가 있으니,

 

 

착빙행( 鑿氷行)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천 사람 만사람이 강가로 나왔네.

꽝꽝 도끼로 얼음을 찍어 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얼음이 설산처럼 쌓이니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파고 드네.

아침이면 아침마다 석빙고로 져나르고

밤이면 밤마다 강에서 얼음을 파내네.

해 짧은 겨울에 밤늦도록 일을 하니

일하는 노래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 맨발은 얼음에 달라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이 얼어 떨어지네.

고대광실 오뉴월 푹푹 찌는 무더위에

예쁜 여인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건네주네.

멋진 칼로 얼음을 깨어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더위를 알지 못하고 한가득 기쁘게 즐기니

얼음 뜨는 그 고생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 겨울 강에서 얼음 뜨던 이들임을.

 

 

  이 시에서 보듯 석빙고에 얼음을 채우는 백성들은 무명옷에 짚신 차림으로 동지섣달 추운 밤에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얼음을 켜서 석빙고로 이고 져다 날랐습니다. 그러면 그 얼음을 먹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이 석빙고를 만든 사람은 조선 영조 18년 당시 이곳의 현감 신서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결국 얼음은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천석꾼, 만석꾼 하는 부자들이 아니라 나라 벼슬을 하는 목민관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목민관들이 무더운 여름을 나기 어려운 노약자를 위한 선정을 베풀 뜻으로 얼음을 준비해 놓았다고 할까요?

 

 만옥정공원에 유달리 많은 선정비와 석빙고를 보면서 희와 비가 엇갈리는 인간사에서 선과 악의 경계, 정의와 불의의 경계를 가늠해봅니다.

 제국의 최고 번영기에 축조한 인도의 타지마할황후의 묘와 진시황의 묘와 만리장성, 이 것들을 위해 당대 백성들은 얼마나 고혈을 흘렸던가?

 그리고 지금 그 고혈의 흔적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몰리며, 또 그로 인해 먹고사는 백성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얼음밭에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도

 흥---쇄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굴러갑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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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29 ~ 30일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가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 과정에 쉽게 믿기지 않는 동네를 구경했습니다. 함안군 산인면에 있는 고려동이라는 동네인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해가 1392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624년 전에 있었던 고려국의 동네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니. . .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본 이 동네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고려의 충절을 지킨 이오 선생의 고려인 마을, 고려동유적지 *

 

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 선생은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 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이오는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 또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이며,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자손들은 1960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벼슬보다는 자녀의 훈육에 전념하여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 고려동 유적지의 볼거리 *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 등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8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700년 꿈에서 깬 아라홍련에 관한 글을 포스팅한 바 있는데 그러고 보니 함안에 아라홍련, 고려동, 서산서원 등 유달리 고려와 관련한 유적이 많네요.

 

 함안군에서는 여기저기 수록된 함안과 관련한 역사의 편린들을 모아 2016. 7. 25 ‘역사에 뿌리 내린 함안의 이야기발행했는데 가야시대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함안의 역사를 재미있게 잘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모은(茅隱) 이오(李午)는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이 두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시운이 적합지 못하다며 벼슬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국운이 다할 무렵 그의 맏형 지평공(持平公) 이신(李申)이 이성계를 돕던 조준, 정도전, 남원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 연유로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고 맏형 이신이 유배 도중 사망하는 변고가 생기자 두문불출로 유명한 서울 두문동에서 지내다가 나중에 모곡에 은거하였습니다. 함주지(1587년 정구가 편찬한 함안군 읍지)를 근거해 볼 때 밀양에 살면서 의령에 자주 왕래하다 무성한 수풀사이에 자미화(백일홍)가 활짝 핀 모습에 나무 밑에 말을 매고 소요하다 그 자리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음을 짐작합니다. 그 후 백년이 지나 본래의 자미나무는 말라 죽고 남은 가지가 밑동에서 자라나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문주에 자미고원(紫微古園)이라...

 

본 나무는 죽고 곁가지가 자라 ...

 

 이오는 함안 원북에 은거한 금은 조열, 합천 삼가 두심동에 은거한 만은 홍재와 함게 왕래하고 운구대(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마을 높은 곳에 있는 배처럼 생긴 바위)에서 시를 읊으며 살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영남삼은(嶺南三隱)라 불렀습니다.

 그가 죽을 무렵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라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며 자신의 비에는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한 자 없는 백비(白碑)를 세우도록 했는데 우리나라 전국에는 여남으개의 백비가 있는데 그 주인을 아는 백비는 효자 이온의 백비, 청백리 박수향 백비, 그리고 이오의 백비뿐이라고 하니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할 것입니다.

 

 고려동에서 주목할 특이점은 종택건물에 있는데 주춧돌은 네모지고 기둥은 둥근 모습으로 그것은 네모는 음이고 원은 양으로 집에 음양의 조화를 담은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음양사상은 그가 살아서 살던 집뿐만 아니라 죽어서 사는 무덤에서도 반영되었는데 그의 무덤은 둥근모양이고 처 의령남씨의 묘는 사각 모양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오라는 인물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음과 양의 조화를 그토록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서 담을 쌓고 이 땅은 고려의 땅이고 저 땅은 조선의 땅이니 하는 그런 결백증세의 삶을 살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가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거부한 그 자체가 고려에 희망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고려말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씨는 허울뿐인 왕가이고 무신정권이 실질적 권력행사를 다 하였으며, 그런 속에서도 왕씨네들은 허울뿐이 왕노릇이라도 서로 하겠다고 혈육간에 아귀다툼을 하므로 나라 안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백성의 삶은 말 그대로 도탄지경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역성혁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왕조에 대한 민심이반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민심이 이미 떠난 왕조는 왕조라 할 수 없다할 것입니다.

음과 양의 조화는 낮이면 해가 뜨고 밤이면 해가 지듯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한 조화라 할 것입니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왕이라도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으로 대접받고 사는 것이 순리라는 사고에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고려국???

담장 안은 고려땅이요 밖은 조선땅이니 조선땅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고려땅 안에서 자급자족

 

 

죽어서도 조선땅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유언에 따라 고령동 내 안치된 신주

 

 조선의 개국을 부정하고 고려를 섬기는 무리들을 좋아할 리 없는 이씨왕조로서는 조선이라는 나라 안에 고려국의 담을 쌓고 사는 이오와 같은 무리들이 얼마나 눈에 가시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동을 용인하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충신들을 위한 서원을 용인한 이유는 백성의 인심이 이미 고려를 떠나 자신들에 있음을 확신하는 자신감의 발로이며, 이미 썩은 짚단이나 다름없는 고려 충신들의 바보 같은 짓을 우상화함으로서 이씨 왕조의 신하들이 이씨 왕조에 충성하도록 하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오는 아들에게 너 또한 고려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라도 절대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받지 말라.”하여 아들 이개지도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손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조선왕조에서 태어났으니 벼슬에 나가도 좋다고 허락하여 손자부터 벼슬을 했다는데 손자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에 관한 함주지의 기록에 그는 나랏일에 오로지 충성과 정직으로 처신하여 벼슬이 병조참지(3)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성품이 근검하고 벼슬이 참지에 이르러도 귀한 품위를 향리에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날 군의 관아에 가는데 길에 천민이 아이를 데리고 말을 탄 채 길 앞을 가로지르니 길을 이끄는 전도가 아무개 영감이 나가시니 길을 비켜라.”고 외쳐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길을 지나므로 잡아서 힐책하려 하니 공이 만류했다.

겨우 네다섯 걸음 가다가 마부아이가 고함을 질러 되돌아보니 말과 사람이 구렁텅이에 엎어져 있었다. 공이 급히 하인을 시켜 구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공이 앞일을 아는 것에 크게 탄복했다. 공이 말하기를 벽지에 사는 천민이 어찌 나라의 벼슬하는 사람을 알겠는가. 그래서 내 묻지 않았노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고려동 안의 율간정 주인 이중현은 조선조에서 꽤 괜찮았던 성품의 충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땅 안에 고려동 담장을 치고, 손자는 조선의 충신으로 고려동 담장 안에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이오의 음양조화였던가?

 

 고려에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왜 이오는 고려의 백성임을 자처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오의 조부 이소봉(李小鳳)한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소봉은 전공을 크게 세워 상장군이 되면서 공민왕의 소생인 공주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오는 고려공주의 손자에 해당합니다.

 이쯤 되면 이오의 입장을 이해할 만 합니다.

 망할 징조가 있는 고려임을 알지만 할머니를 생각한다면 차마 고려를 배신할 수 없기에 고려가 주는 벼슬도 조선이 주는 벼슬도 다 사양하고 두문동과 모곡동에서 은거생활을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오를 두고 우유부단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시류를 알고 눈앞의 벼슬에 연연치 않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음은 그만큼 심신수양이 깊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정권에 기웃 저 정권에 기웃, 이 당에 기웃 저당에 기웃하며 우짜던둥 벼슬에만 혈안이 된 요즘 족속들에 비하면 이오는 분명 존경 받을 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창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짬나시는 분은 고려동에 가서 이 집 주인들의 고뇌를 한 번쯤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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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29 ~ 30일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가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 일정으로 가야읍 아라홍련 시배지와 법수면 옥수홍련 테마파크를 갔었는데 꽃이 만발한 연늪에 서니 내가 마치 불국토에 들어선 듯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연꽃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교와 연등입니다.

 내 기억으로 2천 년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실제 연꽃을 구경하기 쉽지 않았는데 언제 부턴가 연잎밥이 좋다, 연꽃차가 좋다하면서 연 재배가 유행처럼 번져 지금은 쉽게 연꽃을 접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라면서 실제 연꽃보다 사찰에서 문양으로 본 연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찰에서는 불·보살이 앉아 있는 연화좌(蓮華座)를 비롯해서 불전을 구성하는 불단과 천장, 문살, 공포, 공포벽 등은 물론이고 탑, 부도, 심지어는 기와에 이르기까지 연꽃이 장식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불교에서 연이 상징하는 바는 자성청정(自性淸淨), 불이(不二),화생(化生) 사상(思想)입니다.

 

 먼저 자성청정사상인데 인간은 본래 청정하고 지혜로운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수행하여 자성을 바로 알고 나면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그대로 청정하다고 합니다. 연 또한 더러운 진창에서 살지만 결코 진창에 물들지 않는 꽃을 피우니 연꽃은 자성청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다음은 불이(不二) 사상인데 절에 가다보면 불이문(不二門)라는 문이 보입니다. 흔히 듣는 말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생(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있는데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는 하나라는 뜻이지요. 또한 불가에서는 내가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내라고도 하고 견성과 성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성품을 바로 볼 줄 알면 그 자체가 바로 성불이라고 합니다. 연꽃이 다른 꽃들과 다른 점은 다른 꽃들은 꽃이 지고나면 열매가 맺는데 연꽃은 꽃과 열매가 함께 맺으니 견성과 성불을 함께 하는 셈이지요.

 

 

 

 끝으로 화생사상인데 나는 지금까지 왜 연꽃이 화생을 상징한다고 하는지 납득할 만한 근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문이 이번 팸투어에서 700년 전 타임머신을 타고 온 아라홍련을 보고서야 비로소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연화화생사상(蓮華化生思想)에 관한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연꽃은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신비적 상징주의 가운데 혼돈의 물 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Nārāyana)의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는 내용의 신화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연꽃을 우주 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으로 믿는 세계연화사상(世界蓮華思想)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세계연화사상은 불교에서 부처의 지혜를 믿는 사람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때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연화화생(蓮華化生)의 의미로 연결됩니다.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 그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함은 연꽃이 곧 화생의 상징임을 뜻합니다. 사찰 벽화나 불단 장식 중에서 동자가 연꽃 위에 앉아 있거나 연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 역시 연꽃이 화생의 상징임을 묘사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연꽃하면 연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48일 설가탄신일에는 무명으로 가득 찬 어두운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처럼 밝아지고 따뜻한 마음이 불빛처럼 퍼져나가 온 세상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충만토록 해 달라는 염원으로 연등을 밝힙니다.

 

이 사진은 네이버에서...

 

 연등에 관한 고사로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난다라고 하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을 위하여 등불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종일토록 구걸을 하러 다녀 얻은 것은 것이라고는 겨우 동전 두 닢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동전 두 닢으로 등과 기름을 사고 부처님 지나갈 길목에다 작은 등불을 밝히고는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부처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공양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렇게 보잘 것 없지만 등불 하나를 밝혀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리오니 이 등을 켠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도 다음 세상에 태어나 성불하게 해주십시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밝힌 등이 하나 둘 꺼져 버렸습니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도 예외일 수 없이 꺼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등불만은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부처님의 제자 아난은 이 등불에 다가가 옷깃을 흔들어 불을 끄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등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그 때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 등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여인이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여인은 이 공덕으로 앞으로 30겁 뒤에 반드시 성불하여 수미등광여래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꽃이 핌과 동시 열매가 맺고

또한 씨앗 속에 새순이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네이버에서 아라홍련에 대해 검색하니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700년 잠에서 깬 아라홍련

함안군 가야읍 고분길 함안박물관에는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곳곳에 연꽃이 피어있다. 700년 잠에서 깨어나 꽃을 피우는 아라홍련이다. 목간(木簡)의 보고인 함안 성산산성에서 20095월 또 다른 귀중한 유물이 출토됐다. 바로 연씨 10알이다. 2개를 대전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보내 방사성 탄소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한 알은 650년 전, 다른 한 알은 760년 전으로 각각 밝혀져 통상 700년 전 고려시대의 연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여덟개 알을 심은 결과, 그중 3알이 싹을 틔웠고 다음해인 20107700년 만에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아라홍련은 고려시대의 불화에서 볼 수 있는 꽃잎이 길고 색깔이 엷은 선홍색 꽃이다. 꽃잎을 오무렸다가 다시 펼칠 때마다 색깔이 점점 엷어져 나중에는 꽃잎 끝에만 진한 선홍색이 남는 것이 특징이다. 꽃잎뿌리의 새하얀 색깔이 꽃잎을 따라 점점 선홍색을 더해가는 데다 긴 꽃잎의 수수하면서도 우아한 형태가 지금의 연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700년의 잠에서 깬 아라홍련과 마찬가지로 1951년 일본에서도 2천 년이 넘은 연씨로 발아시켜 꽃을 피운 적이 있으며 연씨는 만 년을 넘긴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700년 잠에서 깬 아라홍련은 단순히 한낱 연의 씨앗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께 등불을 공양한 여인 난다의 화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자 무식꾼으로 나무장사를 하다 법을 깨달은 6조혜능선사가 5조홍인선사에게 바친 게송 하나를 여러분께 공양 올리면서 글을 마칩니다.

 

보리본무수 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 明鏡亦非臺,

불성상청정 佛性商淸靜, 하처유진애 何處有塵埃.

 

보리수에 본래 나무가 없으며맑은 경대에 역시 대가 없으며,

불성 또한 항시 청정하거늘,  어디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랴.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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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두고 그 사람 돈 무진장하다라고 하고 물이 엄청 깊을 때 물이 무진장 깊다라고 하는 등으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경지를 두고 '무진장(無盡藏)‘이라 합니다.

그런데 경치도 무진장이요 주인의 즐거움도 무진장한 정자가 있었으니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4-2번지에 있는 무진정인데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른다고 일명 이수정이라고도 불립니다.

 

인터넷에서 무진정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조삼선생(1473 ~ ?)이 직접 지었다는 설과 후손들이 조삼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조선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사림학자 신재(愼齋) 주세붕(1495~ 1554)이 지은 기문(記文)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문의 일부를 옮기자면...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 사람, 만 사람이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 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동인데 선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장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중략)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 일찌감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曾點)의 영기귀(詠而歸)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詩興)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무진정 앞 연못.

과거에는 내가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생기고 주변이 변하면서 연못을 조성.

 

나무에 선 사람의 덩치를 보면 나무의 크기를 짐작... 

                                                                   연못에 떨어진 백일홍 꽃잎과 물풀의 조화가....

           

 

 

당시 선생은 아주 높인 말이었는데 주세붕이 이 기문에서 열네 번이나 선생이라 호칭을 쓰면서 조삼에 대해 지극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조삼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며, 무슨 까닭으로 존경을 받았을까요? 그 까닭에 대해 나는 아래 세 대목으로 짐작해 봅니다.

 

1. 수험준비생이 면접관을 탄핵하는 배짱

조삼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의 손자로 글공부를 좋아하여 1489(성종20) 17세에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곧이어 즉위한 연산군이 폭정을 하자 문과를 단념하고 학문에 힘쓰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중종이 즉위하자 바로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에 힘씁니다.

이 때 사림을 도륙 낸 주범이며 연산군 폭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이 중종반정 이후에도 계속 권자에 있자 울분을 참지 못해 조삼이 성균관 유생의 연명을 받아 유자광을 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중종 2(1507) 그해 조삼은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장면이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조삼은 시험공부를 하는 수험준비생 신분이고 유자광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험생 면접을 보는 면접관이 될 수도 있는 실세 중의 실세의 신분에 있었습니다.

수험준비생이 곧 있을 시험의 면접관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탄핵하는 연판장을 돌린다? ? ?

간이 붓지 않고서야 감히 .....

 

동정문(動靜門)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문을 들어서면....

         

2. 권력, 권한을 나누는 무욕의 정신세계

조삼은 공직에 나아가서는 사헌부 지평· 집의 등 내직과 함양군수, 성주· 상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인정받아 중종으로부터 상품을 하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노년에 들어 공주목사, 안동부사를 역임하면서는 자질구레한 일은 하급관리들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하게 정치를 하다 언관으로부터 게으르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를 두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언관의 지적대로 백성들의 삶 구석구석을 열심히 살피지 않고 대충대충 게으른 정치를 했다고 질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 생각해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손에 들어온 권력 내지 권한을 남과 나누기를 싫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직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권한이 아닌 남의 일에 월권까지 해가면서 권한을 확대하려는 이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삼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이나 권한마저도 하급관리들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게 말은 쉽지만 권력과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물건이기에 마음을 내려놓는 무욕의 정신세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진정 누루에 올라

창을 열고 사방을 둘러보니 조물주의 무진장 세계가 한 눈에....

3. 세상을 내다보는 명철한 안목과 실천의 용기

조삼이 공직에 머물던 시대는 중종반정으로 비록 폭군 연산군이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중종, 인종, 명종을 가운데 두고 훈구파와 사림파, 대윤과 소윤의 권력다툼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나라의 봉록을 얻어먹는 관직의 수는 한정돼 있고 나라에서 충신들에게 지급하는 녹전도 한정되어 있으니 훈구파 세력이 커지면 사림파 몫이 작아지고 사림파 세력이 커지면 훈구파 몫이 작아지므로 목숨을 건 대립이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난세를 감지한 조삼은 벼슬을 뿌리치고 낙향하여 후진양성과 여생을 보내기 위해 무진정을 지었습니다. 조삼이 낙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사화에 희생된 사람 중에는 아무런 죄도 없이 무고하게 죽어간 이도 있을 것이고, 또 개중에는 조삼보다 학문이나 정치술이 뛰어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삼이 우러러보이는 이유는 비명에 간 그들이 권력 또는 벼슬자리에 매몰되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벼슬자리를 떨치고 유유자적 행동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취업할 수 직장이 다양한 오늘날에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관직 말고는 취업자리라고는 없는 당시로서는 관직의 포기는 곧 백수의 길이기에 아무나 결단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관직이라는 것은 생계수단일 뿐만 아니라 돈을 주고 사서라도 하고 싶은 명예와 권력이 있는 직업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 온갖 짓 다해 가며 금배지 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디 먹을 것이 모자라, 입을 것이 모자라 그렇게 안달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명예와 권력입니다.

남들이 이처럼 가지고 싶은 명예와 권력, 그리고 직장까지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과연 내게 있는가하고 스스로 자문해봅니다.

 

 

굽이굽이  흘러온 우리네 역사를 넘보기라도 하듯 무진정 담을 넘는 소나무

 

무진장의 세계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진정의 경치와 바람을 맞으며 한담을 나누는 사람들.

 

 주세붕의 기문 중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삼도(三島)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十州)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며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명퇴든 은퇴든 퇴직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한 분이라면 함안의 무진정에 가서 명예, 권력, 재물에 대한 욕심 다 내려놓고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도 않은 조물주의 무진장 세계를 한 번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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