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서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로 창녕의 유적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는데 창녕에 이렇게 많은 유적이 있는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창녕지석묘, 교동·송현고분군, 진흥왕 척경비, 석빙고 . . .

 

 오늘은 그 중에서도 석빙고와 선정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본래 선정비(또는 공덕비라고도 함)는 그 고을을 다스리던 목민관이 특별히 공과 덕을 많이 쌓아 백성들이 그 은공에 감사의 표시로 세웠던 비석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임기가 끝나고 떠나는 공직자에게 주민들이 주는 감사패와 같은 것으로 요즘의 감사패는 돈 몇 푼 주고 뚝딱 만들어서 손에 쥐어주면 되는 것이지만 당시의 선정비는 돌이나 철로 만든 부피가 큰 물건이라서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물건도 아닐뿐더러 비를 세우는 장소도 확보해야 하므로 지금의 감사패와는 무게감이 확연히 다릅니다.

 

 백성들이 어려운 살림에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돈은 내거나 노역을 제공하여 비석을 세울 정도면 웬만한 은공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창원 진동면사무소와 창녕 만옥정공원에 세워진 선정비를 보면 2~3년 재임하고 간 목민관들의 선정비가 줄줄이 세워져 있는데 해딴에 김훤주 대표의 설명에 의하면 처음에는 임기가 끝나고 간 목민관을 기리기 위한 비였는데 언제부턴가는 부임해 오는 목민관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미리 선정비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 만옥정공원에 있는 선정비 중에는 일제시대에 군수를 역임한 군수의 선정비도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않고서는 공직에 나아갈 수가 없는 시절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과연 그들이 백성들에게 어떤 선정을 베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만옥정 공원에 모아놓은는 선정비들

-위 사진은 실비단안개님 꺼-

 

 다음은 석빙고를 보겠습니다.

 석빙고는 밀양의 얼음골처럼 자연의 현상에 의해 얼음이 절로 만들어지거나 지금의 냉장고처럼 기계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강이나 저수지 얼음을 떼어 내어 여름까지 보관하는 얼음창고입니다.

 

 석빙고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얼음을 저장하기 위하여 만든 석조창고.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는 일은 신라때부터 있었고, 이 일을 맡아보는 관청은 빙고전(氷庫典)이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때 축조된 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고려시대의 유구(遺構)도 발견되거나 조사된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장빙제도(藏氷祭度)가 있어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빙고(氷庫)라는 직제를 두어 5품 제조(提調) 이하의 많은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다.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는 서울의 한강북쪽 연안에 설치되었던 얼음창고인데, 석조가 아닌 목조로 된 빙고였기 때문에 내구성이 적어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경주 석빙고(慶州 石氷庫, 보물 제66안동 석빙고(安東 石氷庫, 보물 제305창녕 석빙고(昌寧 石氷庫, 보물 제310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달성 현풍 석빙고(達城 玄風 石氷庫, 보물 제673창녕 영산 석빙고(昌寧 靈山 石氷庫, 보물 제1739해주 석빙고(海州 石氷庫, 북한 국보 제69) 등이 있다.

 

석빙고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천장에 1~2m의 간격의 4~5개의 홍예(虹霓)라 부르는 아치를 만들고 그 사이가 움푹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사이에 더운 공기가 갇히고 위쪽의 환기 구멍을 통해 빠져 나가게 된다.

 

빗물을 막기 위해 봉토를 조성할 때 진흙과 석회로 방수층을 만들었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왕겨, 밀짚, 톱밥 등의 단열재를 채워 외부 열기를 차단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도록 했다.

 

빙고 외부의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 복사열로 인한 열 손실을 막고, 외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여 외기를 차단했다. 그리고 2~3곳의 환기구를 만들어 외부 공기와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봉토 바깥까지 구조물이 나오게 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전국의 석빙고 7개 중 두 개가 창녕에 있는데 이를 두고 해석을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창녕이 먹고살만한 부자동네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가렴주구 목민관이 많아서였는지...

 

 

 석빙고와 관련 조선시대 김창협(金昌協, 1651~17080)이라는 한 선비의 착빙행( 鑿氷行)이라는 한 시가 있으니,

 

 

착빙행( 鑿氷行)

 

늦겨울 한강에 얼음이 꽁꽁 어니

천 사람 만사람이 강가로 나왔네.

꽝꽝 도끼로 얼음을 찍어 내니

울리는 소리가 용궁까지 들리겠네.

찍어낸 얼음이 설산처럼 쌓이니

차갑고 서늘한 기운이 파고 드네.

아침이면 아침마다 석빙고로 져나르고

밤이면 밤마다 강에서 얼음을 파내네.

해 짧은 겨울에 밤늦도록 일을 하니

일하는 노래소리 모래톱에 이어지네.

짧은 옷 맨발은 얼음에 달라붙고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이 얼어 떨어지네.

고대광실 오뉴월 푹푹 찌는 무더위에

예쁜 여인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건네주네.

멋진 칼로 얼음을 깨어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더위를 알지 못하고 한가득 기쁘게 즐기니

얼음 뜨는 그 고생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지난 겨울 강에서 얼음 뜨던 이들임을.

 

 

  이 시에서 보듯 석빙고에 얼음을 채우는 백성들은 무명옷에 짚신 차림으로 동지섣달 추운 밤에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얼음을 켜서 석빙고로 이고 져다 날랐습니다. 그러면 그 얼음을 먹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이 석빙고를 만든 사람은 조선 영조 18년 당시 이곳의 현감 신서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결국 얼음은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천석꾼, 만석꾼 하는 부자들이 아니라 나라 벼슬을 하는 목민관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목민관들이 무더운 여름을 나기 어려운 노약자를 위한 선정을 베풀 뜻으로 얼음을 준비해 놓았다고 할까요?

 

 만옥정공원에 유달리 많은 선정비와 석빙고를 보면서 희와 비가 엇갈리는 인간사에서 선과 악의 경계, 정의와 불의의 경계를 가늠해봅니다.

 제국의 최고 번영기에 축조한 인도의 타지마할황후의 묘와 진시황의 묘와 만리장성, 이 것들을 위해 당대 백성들은 얼마나 고혈을 흘렸던가?

 그리고 지금 그 고혈의 흔적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몰리며, 또 그로 인해 먹고사는 백성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얼음밭에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도

 흥---쇄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굴러갑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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