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29 ~ 30일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가 주관하는 블로거 팸투어 과정에 쉽게 믿기지 않는 동네를 구경했습니다. 함안군 산인면에 있는 고려동이라는 동네인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해가 1392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624년 전에 있었던 고려국의 동네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니. . .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본 이 동네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고려의 충절을 지킨 이오 선생의 고려인 마을, 고려동유적지 *

 

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 선생은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 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이오는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 또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이며,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자손들은 1960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벼슬보다는 자녀의 훈육에 전념하여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 고려동 유적지의 볼거리 *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 등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8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700년 꿈에서 깬 아라홍련에 관한 글을 포스팅한 바 있는데 그러고 보니 함안에 아라홍련, 고려동, 서산서원 등 유달리 고려와 관련한 유적이 많네요.

 

 함안군에서는 여기저기 수록된 함안과 관련한 역사의 편린들을 모아 2016. 7. 25 ‘역사에 뿌리 내린 함안의 이야기발행했는데 가야시대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함안의 역사를 재미있게 잘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모은(茅隱) 이오(李午)는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이 두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시운이 적합지 못하다며 벼슬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국운이 다할 무렵 그의 맏형 지평공(持平公) 이신(李申)이 이성계를 돕던 조준, 정도전, 남원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 연유로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고 맏형 이신이 유배 도중 사망하는 변고가 생기자 두문불출로 유명한 서울 두문동에서 지내다가 나중에 모곡에 은거하였습니다. 함주지(1587년 정구가 편찬한 함안군 읍지)를 근거해 볼 때 밀양에 살면서 의령에 자주 왕래하다 무성한 수풀사이에 자미화(백일홍)가 활짝 핀 모습에 나무 밑에 말을 매고 소요하다 그 자리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음을 짐작합니다. 그 후 백년이 지나 본래의 자미나무는 말라 죽고 남은 가지가 밑동에서 자라나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문주에 자미고원(紫微古園)이라...

 

본 나무는 죽고 곁가지가 자라 ...

 

 이오는 함안 원북에 은거한 금은 조열, 합천 삼가 두심동에 은거한 만은 홍재와 함게 왕래하고 운구대(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마을 높은 곳에 있는 배처럼 생긴 바위)에서 시를 읊으며 살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영남삼은(嶺南三隱)라 불렀습니다.

 그가 죽을 무렵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라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며 자신의 비에는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한 자 없는 백비(白碑)를 세우도록 했는데 우리나라 전국에는 여남으개의 백비가 있는데 그 주인을 아는 백비는 효자 이온의 백비, 청백리 박수향 백비, 그리고 이오의 백비뿐이라고 하니 문화재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할 것입니다.

 

 고려동에서 주목할 특이점은 종택건물에 있는데 주춧돌은 네모지고 기둥은 둥근 모습으로 그것은 네모는 음이고 원은 양으로 집에 음양의 조화를 담은 것입니다. 그의 이 같은 음양사상은 그가 살아서 살던 집뿐만 아니라 죽어서 사는 무덤에서도 반영되었는데 그의 무덤은 둥근모양이고 처 의령남씨의 묘는 사각 모양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오라는 인물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음과 양의 조화를 그토록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서 담을 쌓고 이 땅은 고려의 땅이고 저 땅은 조선의 땅이니 하는 그런 결백증세의 삶을 살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가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거부한 그 자체가 고려에 희망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고려말 나라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왕씨는 허울뿐인 왕가이고 무신정권이 실질적 권력행사를 다 하였으며, 그런 속에서도 왕씨네들은 허울뿐이 왕노릇이라도 서로 하겠다고 혈육간에 아귀다툼을 하므로 나라 안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백성의 삶은 말 그대로 도탄지경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여 역성혁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왕조에 대한 민심이반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민심이 이미 떠난 왕조는 왕조라 할 수 없다할 것입니다.

음과 양의 조화는 낮이면 해가 뜨고 밤이면 해가 지듯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한 조화라 할 것입니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왕이라도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으로 대접받고 사는 것이 순리라는 사고에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고려국???

담장 안은 고려땅이요 밖은 조선땅이니 조선땅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고려땅 안에서 자급자족

 

 

죽어서도 조선땅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유언에 따라 고령동 내 안치된 신주

 

 조선의 개국을 부정하고 고려를 섬기는 무리들을 좋아할 리 없는 이씨왕조로서는 조선이라는 나라 안에 고려국의 담을 쌓고 사는 이오와 같은 무리들이 얼마나 눈에 가시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동을 용인하고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충신들을 위한 서원을 용인한 이유는 백성의 인심이 이미 고려를 떠나 자신들에 있음을 확신하는 자신감의 발로이며, 이미 썩은 짚단이나 다름없는 고려 충신들의 바보 같은 짓을 우상화함으로서 이씨 왕조의 신하들이 이씨 왕조에 충성하도록 하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오는 아들에게 너 또한 고려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라도 절대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받지 말라.”하여 아들 이개지도 벼슬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손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조선왕조에서 태어났으니 벼슬에 나가도 좋다고 허락하여 손자부터 벼슬을 했다는데 손자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에 관한 함주지의 기록에 그는 나랏일에 오로지 충성과 정직으로 처신하여 벼슬이 병조참지(3)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성품이 근검하고 벼슬이 참지에 이르러도 귀한 품위를 향리에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날 군의 관아에 가는데 길에 천민이 아이를 데리고 말을 탄 채 길 앞을 가로지르니 길을 이끄는 전도가 아무개 영감이 나가시니 길을 비켜라.”고 외쳐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길을 지나므로 잡아서 힐책하려 하니 공이 만류했다.

겨우 네다섯 걸음 가다가 마부아이가 고함을 질러 되돌아보니 말과 사람이 구렁텅이에 엎어져 있었다. 공이 급히 하인을 시켜 구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공이 앞일을 아는 것에 크게 탄복했다. 공이 말하기를 벽지에 사는 천민이 어찌 나라의 벼슬하는 사람을 알겠는가. 그래서 내 묻지 않았노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고려동 안의 율간정 주인 이중현은 조선조에서 꽤 괜찮았던 성품의 충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땅 안에 고려동 담장을 치고, 손자는 조선의 충신으로 고려동 담장 안에 집을 지었으니 이것이 이오의 음양조화였던가?

 

 고려에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왜 이오는 고려의 백성임을 자처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오의 조부 이소봉(李小鳳)한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소봉은 전공을 크게 세워 상장군이 되면서 공민왕의 소생인 공주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오는 고려공주의 손자에 해당합니다.

 이쯤 되면 이오의 입장을 이해할 만 합니다.

 망할 징조가 있는 고려임을 알지만 할머니를 생각한다면 차마 고려를 배신할 수 없기에 고려가 주는 벼슬도 조선이 주는 벼슬도 다 사양하고 두문동과 모곡동에서 은거생활을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오를 두고 우유부단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시류를 알고 눈앞의 벼슬에 연연치 않고 자신을 절제할 수 있음은 그만큼 심신수양이 깊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정권에 기웃 저 정권에 기웃, 이 당에 기웃 저당에 기웃하며 우짜던둥 벼슬에만 혈안이 된 요즘 족속들에 비하면 이오는 분명 존경 받을 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창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짬나시는 분은 고려동에 가서 이 집 주인들의 고뇌를 한 번쯤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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