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9월21일, 22일 양일간에 걸쳐 경남도민일보와 그 자회사인 사회적 기업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에서 주관하는 창동예술촌 블로거 팸투어에 가보았습니다.
창동예술촌 조성사업이 쇠락해 가는 마산의 도심인 창동과 오동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예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하는 통합창원시의 야심찬 도심재생 프로젝터이고, 이날 블로그 팸투어도 이런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홍보전략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마산”이라는 도시는 얼핏 보기엔 지방의 한 작은 도시 같지만 알고 보면 독재정권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 계기를 만든 엄청나게 무게 있는 도시입니다.
그 계기란 3.15 의거와 부마항쟁 사태입니다.
3.15의거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의 데모였고,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 끔찍한 모습의 사진 한 장이 4.19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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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 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들이 시작한 데모가 부산지역 계엄령선포로 마산으로 옮겨와 처음에는 경남대생들이 주축이었으나 차츰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하는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그 심각성을 깨닫고 10월 20일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고, 며칠 후 10월26일 궁정동에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피살되고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맙니다
나는 팸투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역사학자이고 ‘해딴에’의 멤버인 박영주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33년 전 내가 겪었던 사건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나는 79년 3월1일 공무원으로 초임 발령을 받아 당시 마산 월영동 경남대 옆에 있는 창원군청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8일 오후 갑자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만날재 고개로부터 경남대생들이 밀려내려 오고 전투경찰은 영생아파트 쪽에서 올라오며 투석전과 최루탄 전을 하며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데모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수선한 가운데 일과가 끝날 즈음 데모대가 시가지 쪽으로 옮겼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산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박영주씨-
당시 내 나이도 대학생 그들과 같은 나이이므로 사태가 궁금키도 하여 창동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3.15탑 부근에서 차에서 내려 부림시장을 지나 창동쪽으로 가는데 모든 가게는 셔터를 내리고 간판 불마저 모두 소등을 하고 사람들이 없으므로 시가지는 마치 장이 서지 않는 날의 장터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창동사거리쯤에 이르자 데모대는 북마산 쪽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전투경찰은 남성동파출소 쪽에서 전투대열을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유리병을 던지며 진격하였고 빈 가게인줄로만 알았던 가게들 쪽문으로 빈병상자를 들고 나오는 학생과 시민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이 데모가 단순히 학생들의 데모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내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순간 맞은 곳을 짚어보니 인중 왼쪽 코 밑 자리에 손가락 하나가 푹 들어가는 상처가 생겼습니다.
데모대가 던진 깨어진 유리병을 전투경찰이 주워 데모대를 향해 던졌는데 그 중 한 개가 내 얼굴에 박한 것입니다.
피는 쏟아지고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수건을 건네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갔는데 병원 정문은 닫혀 있고 불도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쪽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고 의외로 병원의 의사와 간호원은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전에 학생들과 병원간에 교감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산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학문당 서점-
내가 유리병을 맞은 곳이 아마 이 근처로 짐작됩니다.
간호사가 상처부위 피를 닦고 의사가 막 찢어진 부위를 집으려고 하는 즈음 나이 많은 할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싸매고 들어오는가 하면 온갖 중상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여 의사는 중상환자들을 돌보기에 바빠 간호사가 내 상처를 아홉 바늘 꿰매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뒷날은 얼굴이 퉁퉁 부어 출근하지 못하고 그 뒷날 출근을 하자 복무기강을 담당하는 내무과장이라는 분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공무원 신분으로 반정부 데모를 하는 현장에 왜 가느냐며 당장 시말서를 쓰 오라고 하였고 나는 시말서를 쓰다 받쳤습니다.
시말서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유독 시말서를 많이 썼던 문제 공무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장발이라고 시말서, 장발을 시비하므로 빡빡머리를 하고 갔더니 빡빡머리라고 시말서, 빨간 골덴 바지 입었다고 시말서, 운동화 접어 신었다고 시말서... 등등
오죽했으면 직원들이 “네는 차라리 시말서 등사해 놓고 날짜만 바꿔서 내라.”는 말까지 했을까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구속과 압박이 세상을 짓누르던 시절이 유신시절이었고, 이런 억눌림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민중의 욕구가 분출했던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되돌아보면 그 날 깨진 유리병에 본래 주름진 곳을 맞았기에 다행이지, 만일 눈이나 코에 맞았더라면 이 잘 생긴 얼굴(^v^)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
그날 나는 “이곳에서 부마항쟁의 흔적은 내 얼굴에 남아있는 이 아홉 바늘 상처 자국뿐이지 아무것도 없다”며 농을 하기도 했지만 정말 33년 전 그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진 창동사거리에는 그날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이라도 창원시에는 그날을 상기할 수 있는 조형물이나 사진 전시장을 이곳 창동사거리에 하나쯤 설치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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