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군'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3.12.11 거창군 용바위골 전투 위령비 세워야. (1)
  2. 2013.02.08 고로쇠와 변강쇠의 관계. (2)
  3. 2013.01.29 커피 한 잔의 깨달음. (4)
  4. 2013.01.28 탐욕에도 급수가 있다? (4)
  5. 2013.01.02 용암마을 물레방아 발전기의 실화. (2)

  거창의 가북면 용암마을에 눈이 내리니 지난해 눈길에서 길을 묻던 70대 노인이 생각납니다.
 “두 살 위인 형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이곳 용암마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지만 시신이 어디 묻힌 줄 몰라 가끔씩 이 마을에 와서 길가에 소주 한 잔 부어놓고 산을 향해 절만 하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용암마을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종종 그런 일이 있다며 6.25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후 북으로 후퇴하던 북한군 1개 사단이 퇴로를 잃어 가야산과 우두산 일대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국군 3개 사단과 경찰병력이 북한군 토벌작전에 나섰는데 밤에는 북한군이 양식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오고,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음식을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북한군은 군기가 서서 민가에 행패를 부리지 않았는데 한 번은 한 사병이 닭을 잡아가려다가 장교에게 들키자 장교는 그 자리에서 사병을 권총으로 사살해버리는 광경을 목도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국군과 경찰은 밥상과 술상을 차려서 오라하고 반찬이 없으면 ‘우리가 당신들을 지켜주는데 대접이 이게 뭣이냐!’며 밥상을 차버리는 행패까지 부렸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절대 큰길을 다니지 않고 산길을 다니고 국군과 경찰은 주로 큰길을 다녔는데 하루는 경찰 1개 중대가 동네 앞 큰길을 가다가 잠복해 있던 북한군에 의해 전멸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다가 이 동네 이름의 용바위(용암) 고지에서 몇날며칠을 콩을 볶듯 총성을 울리며 총력전을 하다가 결국 북한군은 괴멸되었지만 아군의 사상자 또한 북한군의 수보다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당시 군인이 아닌 마을 청년들은 사망한 국군의 시체를 거적때기로 운반하며 부상병을 업어 나르기도 하고, 총포화기를 지게로 저다 나르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답니다.

 

 지금도 죽바우골이라는 곳에 가면 북한군이 은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 참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눈이 내리는 이런 날에 그들의 춥고 배고픈 참상이 어떠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기도 합니다.
 새벽 포행길에 이곳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그 원혼들이 나타날까 겁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만일 원혼들과 마주친다면 기꺼이 손이라도 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그곳이 안온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곳의 이런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거창군의 도서관과 문화원을 찾아 기록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흔적이 없었습니다.
 거창군의 6.25전쟁사에서 반공연맹 양민학살 사건으로 죽은 원혼들은 위령비라도 세워 위로하고 있지만 그 보다 사상자 규모가 몇십 배 되는 용바위골 전투 사상자의 시신과 원혼들은 눈 내리는 산야 어디에서 잠들어 있는지?

 

 

 

 용암마을에서 전사하여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원혼들과 제단도 없이 산만 쳐다보고 절을 하고 가는 유족들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위령비 하나쯤은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자체나 국가가 나서서 좀 더 증언들을 채집하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한국전쟁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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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산 2013.12.18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래 글은 선비님이 거창군청 전자민원에 올린 위 제안에 대한 답변서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군의 향토이야기와 근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용바위골 전투 위령비 세워야”라는 제안을 해 주신 선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선비님의 제안에 답변을 드리기 위해서는 빨치산과 우리군 지역의 빨치산 전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기에 ‘빨치산 발생’ ‘빨치산 활동’ ‘빨치산 토벌 시작’ ‘거창지역의 빨치산 활동’ ‘거창지역에 국군진입’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빨치산 종결’과 ‘제안에 대한 답변’ 순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1. 빨치산 발생
    6.25 전쟁 중 1950.9.17. 인천상육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병들이 북한군의 지령에 따라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이후 지리산과 덕유산을 근거로 하여 아군의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유격전술로 장기 항전을 결정하였으며, 월동을 위하여 소규모로 흩어져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지내기로 하고, 지리산 노고단, 반야봉, 함양 백운산, 거창 감악산, 달궁, 장악산, 덕유산, 천마산, 칠봉, 삼도봉을 연하여 분산하고 유격지를 설정하였으며, 이들은 남침 후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때까지 점령지내에서 공산주의 사상교육으로 통하여 포섭한 사람들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유격대원으로 편성하였으며, 이와 같은 유격대가 당시의 빨치산입니다.

    2. 빨치산 활동
    빨치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주로 지서와 면사무소)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남북과 경남 일부 지역의 양민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하였으며, 주로 밤이면 산 아래로 내려와 민가를 기습하여 곡식과 짐승을 약탈하였으며,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가 약탈한 곡식 등을 산으로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3. 빨치산 토벌 시작
    빨치산 출몰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빨치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으며, 처음에는 경찰과 지역젊은이로 조직한 반공청년단이 빨치산 에 대응하였으나, 경찰 등의 전투력이 빨치산에 크게 부족하여 빨치산의 점령지역이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또 주변지역까지 확장되었으며, 빨치산의 후방교란으로 그 피해가 날로 커지고, 정규군의 전방 전투에 악영향이 미치자 육군본부에서 빨치산 토벌을 결정하고 1949년 3월 1일 국군 11사단을 빨치산 토벌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4. 거창지역의 빨치산 활동
    거창지역에는 덕유산을 근거로한 빨치산이 북상면과 위천면, 마리면을 점령하고, 거창읍까지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산을 타고 다니며, 고제면과 가북면의 관공서를 습격하여 불태웠고, 해인사까지 진출하였으며, 지리산 빨치산부대 중 감악산을 근거로한 빨지산은 남상면과 신원면, 산청의 차황면과 오부면, 함양의 마천면과 유림면 일원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특히 감악산 빨치산이 악랄하여 신원면 소재지 관공서를 점령하고, 경찰가족까지 살해하는 등 병폐가 매우 심 하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창녕경찰서 경찰들이 이들에게 크게 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5. 거창지역에 국군진입
    창녕경찰의 큰 패전 후인 1951. 2. 4. 빨치산토벌을 위해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처음으로 거창지역에 들어왔으며, 당일은 거창농고 교정에서 숙영을 하고, 다음날 남상면에서 감악산을 수색하며, 신원면을 거처 산청군 차황면으로 빠져나갔습니다.

    6.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2. 8. 오부면 등지에 있든 3대대 후속부대 군인들이 빨치산의 기습으로 대부분 전사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2. 9. 재차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어온 3대대장 한동석 소령과 병력의 행동이 광란으로 돌변, 마을을 방화하고, 전 주민들을 마을 앞 논들로 끌어내어 학살하고,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2. 10.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질러 태우고, 주민들을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계곡에서 학살하였으며, 2. 11. 한동석은 10일 날 3개리에서 끌고 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이들 중 통비분자로 선별한 주민 517명을 박산골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3일간 세 곳에서 희생된 주민이 719여명 이며, 이 사건의 작전명이 “견벽청야”이고, 거창양민학살사건입니다.

    7. 빨치산 종결
    이 후 국군 정규군의 토벌작전으로 거창에서 물러간 빨치산은 지리산의 각 지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아군에게 산발인 공격을 거듭하였으며, 여순반란사건으로 세를 불리기도 하였고, 1963. 11. 12.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8. 제안에 대한 답변
    제안하신 가북면 용암마을 주변에서 발생한 전투는 위와 같은 빨치산 일부 잔당과 경찰(반공청년단 포함)간의 소규모 전투로 추정됩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6.25사변 때 우리 거창군 지역에는 지리산과 덕유산권 빨치산의 주요활동 지역이었든 관계로 산발적인 전투지역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참전경찰도 많으며, 참전경찰 중에는 전사자 또한 다수입니다. 그래서 거창군에서는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근린공원 중앙에 현충시설(위패봉안각, 충혼탑 등)을 건립하여 전몰 군인과 경찰 등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시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6.25사변과 빨치산 전투 중 불행히 전사 하신분과 부상을 당하신분은 모두 국가보훈처에 등록이 되어 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고 있으며, 부상을 입지 않은 참전유공자에 대하여는 국가보훈처에서 매월150,000원씩 참전명예수당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군에서도 별도로 월50,000월씩 참전명예수당을 따로 드리면서 이분들이 작고하셨을 때에는 가족에게 위로금 300,000원을 드리고 있는데 우리군의 명예수당을 내년 1월부터 월80,000원으로 올려서 지급하기로 군 조례를 개정하였습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 국가를 위해 용감하게 참전하신 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그 가족의 명예와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작은 보훈이나마 늘려가고 있다는 말씀으로 숱하게 많은 전투장소 마다 기념시설물을 다 건립하지 못함을 대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25일에는 15년 전 창원에서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마을로 귀농을 한 사람을 따라 고로쇠 수액 채취 준비작업을 하는데 함께 가 보았습니다.

거창의 오지 중의 오지마을인 이곳에 온 사연은 나와는 사뭇 다른데 우연히도 그는 고향도 나와 같은 남해이고 창원에서 살기도 했으며, IMF를 맞아 경제적 형편이 어렵고 자신과 아내의 건강마저 위태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합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불교와 연을 맺고 참선공부를 많이 하여 내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므로 자연스레 절집의 말동무가 되었습니다. 나는 특히 불교에서 말하는 참 나라는 것에 대해 딱히 개념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그는 내 몸은 자동차요, 자동차는 저절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운전수가 운전하는 대로 가고, 그 운전수가 참 나다라고 했는데 그제야 나는 참 나라는 개념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나의 사부가 되는 셈이지요.

 

아무튼 그런 그는 토박이가 아니기에 고로쇠를 채취하기 쉬운 길목 좋은 곳은 토박이들 차지가 되고 산이 깊고 길이 없는 깊은 계곡을 따라 고로쇠 채취 곳을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산을 오르면서 고로쇠 물은 처음 채취할 때 물이 아무래도 진하고 한꺼번에 많이 마시는 것보다는 집에서 오차물 마시듯이 하여 2달 정도 장기간 마시는 것이 좋은 것 같더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길도 없는 산을 마치 안마다을 걷듯이 올랐는데 나는 따라 가느라 적잖이 욕을 봤습니다. ㅋㅋ

 

-고로쇠에 얽힌 전설-

 

첫째,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전쟁이 한창이던 지리산에서 양국의 군사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뒤 파김치가 되어 타는 갈증으로 서서히 지쳐가고 주위에는 마실만한 물이 없었는데 화살이 박힌 나무에서 물이 뚝뚝 흘러 병사들이 입을 대고 그걸 마시고 갈증을 말끔히 해소했다.

 

둘째, ‘고로쇠라는 어원에 관한 전설로,

통일신라 도선대사가 이른 봄에 백운산 깊은 곳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좌선하던 도선대사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무릎이 펴지질 않았다.

대사가 다시 일어나 보려고 곁에 있는 나무를 잡자 가지만 부러져버리고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물이 나왔는데 대사는 그 수액으로 목을 축이자 거짓말처럼 무릎이 펴졌다. 그리하여 대사는 뼈에 좋은 물이라 하여 골리수(骨利水)’라 이름을 붙였다.

 

셋째, 지리산골에 살고 있던 변강쇠가 사랑 놀음으로 몸이 허약해졌는데 고로쇠 수액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였다.

 

 

 

-수액채취를 함에 있어 고로쇠 나무가 산재한 곳에는 봉지를 달고 밀집해 있는 곳에는 호스를 달아 놓았습니다.

 

 

-고로쇠 수액의 효능

 

 한방에서는 나무에 상처를 내어 흘러내린 즙을 풍당(楓糖)이라 하여 위장병·폐병·신경통·관절염 환자들에게 약수로 마시게 하는데, 즙에는 당류(糖類) 성분이 들어 있다하고.

 

 과학적 성분분석으로는 고로쇠 수액에는 당분과 아미노산이 풍부하고,칼슘,칼륨,마그네슘,염산이온,황산이온 등의 미네랄 성분이 보통 물의 40배 정도가 들어 있다.

고로쇠 수액은 물보다 흡수가 빠르고 배설도 빠르기 때문에 몸의 독소를 빠르게 배설하여 신체 정화에 이롭고, 부종과 술독, 간장과 신장 해독에 좋으며, 어지럽거나 기력이 달리고, 위장병에 도움이 된다.

특히 고로쇠 수액은 뼈가 약한 사람과 관절염과 골다공증을 예방하려는 사람에게 특히 좋다.

 

 

-저 위로 내가 며칠 전 오르려고 했다가 죽을 뻔 했던 해발 1320미터의 단지봉이 보입니다.

 

 

-온통 갈색뿐인 겨울산에 이렇게 또 진녹색의 식물이 있다는 것이....

 

 

-요즘 어딜 가나 사방댐을 만들어 놓았는데

 여름에 이곳에 오면 아무도 오는 이가 없어 홀딱 벗고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다고 하니

 금년 여름에는 음~~

 

 

-고로쇠 물 마시는 법.

 

 고로쇠 물을 마시는 방법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딱히 정답은 없는 것 같은데 상황에 따라 대충 다음과 같이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숙취나 몸속의 노폐물 배출을 위한 목적이라면 짧은 시간에 많은 량을 섭취하여 땀과 오줌으로 노폐물을 배출하고 고로쇠 수액에 포함된 영양분을 섭취하는 방법이 있고,

 관절염이나 골다공증 예방을 위한 목적이라면 집에서 마시는 오차물 대용으로 장기간 상시적으로 복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장을 담그거나 장아찌 음식을 담글 때 물 대신 고로쇠 수액을 사용하면 그 맛이 훨씬 좋다고 합니다.

 

거창의 단지봉 고로쇠 첫물을 마시고 싶은 분은 오늘도 참나를 운전하는 김찬성씨

(전화 010-3520-0598)에게 전화로 주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심성이 하도 곱고 착하여 저의 명예를 걸고 감히 추천을 하는 바입니다.

(거창 단지봉 고로쇠 수액 채취는 아무래도 정월 보름 정도가 되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싶다 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로쇠와 변강쇠는 끝 글자가 자 돌림자인데 혹시 그 사연을 아십니까?

혹 아시는 분이 계시면 댓글 주시면 감쏴~~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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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3.02.09 0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로쇠 박사가 다 됐습니다.
    선비님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절집에서는 대체로 녹차나 전통차를 마십니다만 혼자서 식후의 차로는 아무래도 커피만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1회용 커피를 뜯다가 문뜩 30년 전 우연히 보게 된 마누라의 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찻집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차그릇이 많은데 마누라가 유난히 차그릇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제사 짐작할 것 같습니다.

 

 일기장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면장실에  손님이 왔다.
  면장님이 나보고 커피를 타오라고 했다.
  순간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디로 숨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한 번도 커피를 타 본적 없다.
  나도 하루빨리 커피 타는 법을 배워서 당당하게 손님을 맞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아니 꼭 그렇게 하리라.」

 

 

 

 지금 보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1978년이니까 이때는 1회용 커피라는 것이 없었고,

 마누라는 집이 가난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서기를 하기까지 단 한 번도 커피라는 것을 마셔보지도 타보지도 않았기에 그만. . . .

 이사할 때마다 무게도 무겁고 다루기도 조심스러운  차그릇 때문에 엄청 다투었는데 오늘에사 마누라의 집착증을 이해하게 되네요.

 

  나무관세음보살~~
  ㅋㅋ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용암선원에서-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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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3.01.29 0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모님 '친환경, 무공해 어머니상'이라도 드려야겠습니다.

  2. 장복산 2013.01.29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나님이 옆에 없으니
    이제사 커피 한 잔 타면서도
    마나님 생각이 나나보군.~!!

    철이들어 간다는 징조...
    ㅋㅋㅋ

 

효봉 원명 대종사의 법문 일부입니다.

 

 불조(佛祖)는 내 원수요 중생은 내 친구

.
 “입을 열면 부처와 조사(祖師)의 뜻을 어기고 입을 열지 않으면 대중의 뜻을 어긴다. 어떻게 하면 불조(佛祖)와 대중의 뜻을 어기지 않겠는가?”

 

 한참 있다가,
“부처와 조사는 내 원수요 대중은 내 친구다. 일찍 듣건대 진주(眞州)의 불제자들은 그 머리에 모양 없는 뿔이 났는데, 그 뿔이 부딪치는 곳에는 아무도 대적할 이가 없다하니, 그 경지를 한 번 말해 보라”하였다.

 

 대중이 말이 없자,
“아, 유쾌하다. 말이 없는 그 가운데 시방(十方)의 허공이 다 무너졌도다.”하고 말씀 하셨다.
 “내가 지금 중생세계를 두루 보니, 나고 늙고 앓고 죽음을 누가 면할꼬. 만일 이 네가지 고통을 면하려거든 생사가 없는 그곳을 모두 깨쳐라. 생사가 없는 곳이 곧 열반이요, 열반을 구하는 것이 곧 생사다. 그러나 생사와 열반은 허공꽃과 같아서 있는 듯 하지마는 진실이 아니니, 생사를 싫어 하지도 말고 또 열반을 구하지도 말라.

 

 수행문(修行門)에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三學)이 있다.
 계율은 탐욕을 다스리고,
 선정은 분노를 다스리며,
 지혜는 우치를 다스린다.

 이 탐욕과 분노와 우치의 삼독(三毒)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의 삼독이요, 둘째는 이승(二承)의 삼독이며, 셋째는 보살의 삼독이요, 넷째는 부처의 삼독이다.

 

 범부의 삼독이란 오욕(五欲)을 비롯하여 일체의 요구를 탐욕이라 하고, 매를 맞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기타의 모든 역경에 대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분노라 하며, 바른 길을 등지고 삿된 길에 들어가 법을 믿지 않음을 우치라 한다.

 

 이승의 삼독이란 즐겨 열반을 구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생사를 싫어하는 것을 분노라 하고, 생사나 열반이 모두 본래 공(空)인 것을 알지 못함을 우치라 한다.

 

 보살의 삼독이란 불법을 두루 구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이승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분노라 하며, 부처 성품을 분명히 모르는 것을 우치라 한다.

 

 부처의 삼독이란  중생을 모두 구하려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를 방어하려는 것을 분노라 하며, 45년 동안 횡설수설한 것을 우치라 한다.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마을의 한 산장에 있는 표석입니다-<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貪慾元是道라
嗔痴赤復然이라.
如是三毒中에
俱一切佛法이로다.

탐욕이 원래 바로 그 도이며
분노와 우치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와 같은 삼독 가운데에는
모든 불법이 갖추어져 있네.

 


 나는 이제 대중에게 묻노니 이것이 바로 대중의 경계인가,  또는 저 문수와 보현의 경계인가?

 대중의 경계라 해도 30방(三十棒)을 내릴 것이요, 또 문수와 보현의 경계라 해도 30방을 내릴 것이니 어떻게 하면 그 30방을 면할 수 있을까?

 

 대중이 말이 없자 스님이 말씀 하셨다.
 “남강(南江)의 어부(漁夫)가 그 30방을 맞고 달아났도다.”


 그리고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君子故鄕來하니
應知故鄕事라.
來日綺窓前에
寒梅着花未아

그대가 고향으로부터 오니
아마 고향의 일을 알리라.
떠나는 날 그 비단창 앞에
매화꽃이 피었던가 안 피었던가?

 

-----------------------------------------------

 

<선비의 생각>

 

 내가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나인데 삼독에 네것 내 것이 어디 있으며,

 떠나고 머무름이 없는데 고향이 어디 있으며 소식 또한 어디 있겠는가?

 

 

 

 이 놈들은 지금 웃고 있는가, 울고 있는가?

 웃고 있다고 해도 30방, 울고 있다고 해도 30방,

 그러면 대중들은 어떻게 해야 30방을 면할 수 있을꼬? ㅋㅋㅋ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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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도 급수가 있다?  (4) 2013.01.28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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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13.01.29 0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득도하셨군요.

  2. 장복산 2013.01.29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냥 나도 30방 맞고 말란다.
    내가 보기엔 저넘들 허벌나게 기분이 좋아서 웃고 있는게 분명하다.

  3. 땡삐 선비(sunbee) 2013.01.30 12: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복산님은 아무래도 30방 맞아야 하겠습니다.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고 개이기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종족보전 의무를 다하느라 저토록 고통스러와 하는데...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용암마을의 이야기입니다.


 신년을 맞은 1월1일 마을회관에서 떡국을 끓여 마을사람들끼리 나눠먹기로 되어 있어 이 날은 하루동안 두 번이나 제설작업을 했지만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노인네들 거동이 위험하여 끝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밤사이 약간 눈이 오긴 했어도 아침부터 햇살이 좋아 마을회관에서 떡국을 끓여먹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 들입니다.

 

 

 

 

 -이 마을에는 예전에 물레방앗간이 개인 것과 마을 것 두 개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개인이 모두 인수하여 운영하다 남아있는 흔적이 이 곳이고,

 바로 이곳에서 발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바구 1)
 지금 마을회관의 자리에 일제시대에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송정마을의 용암초등학교 폐교는 1940년도에 건립되었고, 지금 73살인 이 마을 이장님이 7회 졸업생이라고 하니까 80살 되는 노인네들이 이 학교의 1회 졸업생인 셈입니다.
 그 보다 나이 더 많은 분들은 정부의 인가도 없는 이 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이 마을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선생님은 이태석이라는 분인데 이 동네 누구네 집에 셋방살이를 하였고 공식적으로는 일어를 가르쳤는데 몰래몰래 우리 한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한 그 선생님은 부녀자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동네 몇몇 아녀자들도 그때 공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비춰본다면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 문화와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는 선각자들은 반대로 우리의 문화와 사상을 교육시키려 했던 만큼 이곳 산골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겠지요.

 

 

-이곳이 마을회관 겸 노인정이고 옛날에 학교터였다고 합니다.-

 

 -송정마을의 학교도 결국 폐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주민이 효소학교로 운영하는 중입니다-

 

 

 

-"빈부귀천 차별없이 다같이 배우세"라는 가사가 인상적입니다-

 

 

 

-이 지도의 발행년도가 1975년이니까 이 쯤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도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겠죠-

 

 

 

-공업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설명하고 있는데 박정희가 호남을 홀대해서가 아니라 공업의 입지조건(자본, 노동력, 공업용수, 욕.해상교통)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이바구 2)
 6.25 전쟁이 끝나고 빨치산들이 동네에 들어와 약탈을 해갔는데,
 누구네 집은 불을 질러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누구네 집은 어미소와 송아지를 모두 가져가므로 송아지만이는 두고 가라고 사정을 하자  집단에 불을 붙여 초가지붕에 불을 붙이려하므로 그걸 말리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유유자적하게 송아지마저 몰고가버렸다고 합니다.


 빨치산이 물러가고는 경찰들이 마을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당시 가북면 지서의 한 경찰관이 마을주민에게 밥상을 차려오라고 하고선 반찬이 시원찮다며 밥상을 발길로 차버렸는데,
 마치 동생이 공군인데 휴가를 나와서 이 모습을 보고선 권총으로 경찰관의 옆구리에 대고 “밥상 한 번 더 차봐라.”하니까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빌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빨갱이 토벌작전이 전개되던 그 시절 산간오지의 마을들은 낮에는 국군과 경찰의 괴롭힘에, 밤에는 빨갱이들의 괴롭힘에, 그야말로 민초들의 삶은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던것이지요.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을 읽노라면 가슴이 미어지고 손가락끝이 오그라드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애환이 구구절절 하지요

 

 이바구 3)
 용암마을이 거창군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전기 공급 등의 문명화에는 10년 정도 앞서 갔는데 아마도 앞의 그 선생님 덕분 아닌가 싶기도 하답니다.
 특히, 전기의 경우에는 한전이 이곳 주변지역에 전기 선로를 깔기 10년 전에 용암마을은 전기를 이미 사용했는데 그 전기를 동네 앞 하천의 물레방아로 생산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물레방아로 전기를 생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를 않아 다시 확인을 하자 노인들이 모두가 맞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엔 선풍기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고 백열전구 전기가 고작이고 보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조량이 짧은 대신 물이 풍부한 이런 산골마을에서는 태양열 전기보다는 물레방아전기가 더 효율적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노인정의 이모저모 모습들입니다. 이 동네 주민 대부분이 모인 셈입니다-

 

 

 

 

 

 

 

 

 

 

 

 

 

 

 

-. 마치 아궁이와 굴뚝을 연상하게 마을회관 앞에 있는 굴뚝나무입니다.

 누군가 고사를 지낸다고 나무 밑둥에 촛불을 켜놨다가 그만 나무에 불이 붙어 속이 새까맣게 탔는데도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용암선원입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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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3.01.03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재있게 실구 있구려.
    나는 지난 여름에 거창 소사고개로 가는 원기마을에서
    하루밤을 엄청 시원하게 자고 왔지여...
    그디...선비님은 엄청 춥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