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

남과 여. 로망과 로맨스. 그리고 세컨하우스

남과 여. 로망과 로맨스. 그리고 세컨하우스 자세히보기

내가 좋아하는 글

탐욕에도 급수가 있다?

선비(sunbee) 2013. 1. 28. 14:05

 

효봉 원명 대종사의 법문 일부입니다.

 

 불조(佛祖)는 내 원수요 중생은 내 친구

.
 “입을 열면 부처와 조사(祖師)의 뜻을 어기고 입을 열지 않으면 대중의 뜻을 어긴다. 어떻게 하면 불조(佛祖)와 대중의 뜻을 어기지 않겠는가?”

 

 한참 있다가,
“부처와 조사는 내 원수요 대중은 내 친구다. 일찍 듣건대 진주(眞州)의 불제자들은 그 머리에 모양 없는 뿔이 났는데, 그 뿔이 부딪치는 곳에는 아무도 대적할 이가 없다하니, 그 경지를 한 번 말해 보라”하였다.

 

 대중이 말이 없자,
“아, 유쾌하다. 말이 없는 그 가운데 시방(十方)의 허공이 다 무너졌도다.”하고 말씀 하셨다.
 “내가 지금 중생세계를 두루 보니, 나고 늙고 앓고 죽음을 누가 면할꼬. 만일 이 네가지 고통을 면하려거든 생사가 없는 그곳을 모두 깨쳐라. 생사가 없는 곳이 곧 열반이요, 열반을 구하는 것이 곧 생사다. 그러나 생사와 열반은 허공꽃과 같아서 있는 듯 하지마는 진실이 아니니, 생사를 싫어 하지도 말고 또 열반을 구하지도 말라.

 

 수행문(修行門)에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三學)이 있다.
 계율은 탐욕을 다스리고,
 선정은 분노를 다스리며,
 지혜는 우치를 다스린다.

 이 탐욕과 분노와 우치의 삼독(三毒)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의 삼독이요, 둘째는 이승(二承)의 삼독이며, 셋째는 보살의 삼독이요, 넷째는 부처의 삼독이다.

 

 범부의 삼독이란 오욕(五欲)을 비롯하여 일체의 요구를 탐욕이라 하고, 매를 맞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기타의 모든 역경에 대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분노라 하며, 바른 길을 등지고 삿된 길에 들어가 법을 믿지 않음을 우치라 한다.

 

 이승의 삼독이란 즐겨 열반을 구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생사를 싫어하는 것을 분노라 하고, 생사나 열반이 모두 본래 공(空)인 것을 알지 못함을 우치라 한다.

 

 보살의 삼독이란 불법을 두루 구하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이승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분노라 하며, 부처 성품을 분명히 모르는 것을 우치라 한다.

 

 부처의 삼독이란  중생을 모두 구하려는 것을  탐욕이라 하고,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를 방어하려는 것을 분노라 하며, 45년 동안 횡설수설한 것을 우치라 한다.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마을의 한 산장에 있는 표석입니다-<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貪慾元是道라
嗔痴赤復然이라.
如是三毒中에
俱一切佛法이로다.

탐욕이 원래 바로 그 도이며
분노와 우치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와 같은 삼독 가운데에는
모든 불법이 갖추어져 있네.

 


 나는 이제 대중에게 묻노니 이것이 바로 대중의 경계인가,  또는 저 문수와 보현의 경계인가?

 대중의 경계라 해도 30방(三十棒)을 내릴 것이요, 또 문수와 보현의 경계라 해도 30방을 내릴 것이니 어떻게 하면 그 30방을 면할 수 있을까?

 

 대중이 말이 없자 스님이 말씀 하셨다.
 “남강(南江)의 어부(漁夫)가 그 30방을 맞고 달아났도다.”


 그리고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君子故鄕來하니
應知故鄕事라.
來日綺窓前에
寒梅着花未아

그대가 고향으로부터 오니
아마 고향의 일을 알리라.
떠나는 날 그 비단창 앞에
매화꽃이 피었던가 안 피었던가?

 

-----------------------------------------------

 

<선비의 생각>

 

 내가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나인데 삼독에 네것 내 것이 어디 있으며,

 떠나고 머무름이 없는데 고향이 어디 있으며 소식 또한 어디 있겠는가?

 

 

 

 이 놈들은 지금 웃고 있는가, 울고 있는가?

 웃고 있다고 해도 30방, 울고 있다고 해도 30방,

 그러면 대중들은 어떻게 해야 30방을 면할 수 있을꼬? ㅋㅋㅋ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 개금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