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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창원에서 독립만세운동 원조는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아닐까?

선비(sunbee) 2019. 3. 5. 12:28

 목포의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손혜원 의원의 땅투기 의혹으로 시끄럽긴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일제 강점기 유산도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추세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원과 마산에서만큼 역사문화유산이 흔적 없이 사라진 도시도 드물지 싶습니다.

 그 이유는 마산과 창원이라는 도시가 지리적 여건상 수출입과 공업화에 유리한 위치에 있어 전라도나 충청도의 도시들에 비하여 산업화,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개발에만 몰두한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창원의 경우 전국 5도호부 중 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원향교를 제외하면 역사적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같이 흔적 없이 사라진 창원의 역사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재조명하고자 하는 블로거 조현근씨는(블로그-팬져의 국방여행) 근래 대단히 유의미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창원 북동동시장 일대에서 창원읍성의 흔적을 찾았고, 둘째는 창원 동정동의 일제신사를 찾았고, 셋째는 1943년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한 유일한 생존자 오경팔옹을 찾은 것입니다.


창원읍성 복원과정에서 나온 선정비들

동정동에 있었던 일본신사의 모습

-사진은 조현근의 블로그에서-


창원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생존자 오경팔옹을 찾은 조현근.

 나는 오경팔옹을 인터뷰하러 간다는 조현근씨의 전화를 받고 ‘오경팔?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하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30여 년 전 내가 창원시 공무원으로 재직할 무렵 창곡동에서 무허가건물 단속과 관련하여 사건이 기억났습니다. 과거 거주지와 도의원에 출마했던 경력으로 비추어 틀림없이 동일 인물이었지만 나의 기억에 비추어보아 그 오경팔씨가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조현근씨의 걸음이 별 소득 없는 헛걸음이 될 것으로 짐작하였습니다만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오경팔옹은 조현근씨의 인터뷰로 인해 창원시장으루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고 많은 언론에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현근씨가 오경팔옹을 찾아 최초 인터뷰를 하고 세상에 알린 당사자라는 점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창원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오경팔옹

-사진은 경남매일기사에서-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삼진, 웅천 4.3만세운동의 원조로 짐작하는 근거는? 

 창원시는 지금까지 마산지역의 삼진과 진해지역 웅천의 4.3만세운동에 대한 기념행사는 해왔지만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에 오르내리는 이가 없었습니다.

 삼진의거는 전국 4대 의거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인데 창원대도호부 청사와 함께 인구가 가장 많았던 창원읍의 읍민만세운동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원읍민 만세운동은 3월23일과 4월2일 두 차례 있었고 한번에 6,000~7,000명의 인원이 참여했다고 하니, 날짜로도 삼진과 웅천의 4월3일보다 빠르고 숫자 면으로도 삼진의 5,000명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만고 내 생각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시대에 따라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창원대도호부의 역사는 1601년(선조34년)에 시작하여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다음해인 1895년(고종32년)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리고 1907년 창원대도호부 청사는 현재의 창원초등학교 전신인 창흥학교 교사로 사용됩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조선말기 창원읍에는 관료출신이나 교육을 받은 이가 많았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에 대한 접근도 빨랐을 것입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역사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만세운동의 시작점이 시장인데 비해 창원읍민만세운동의 발원지는 위의 창흥학교에서 시작하여 시장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보자면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삼진과 웅천의 만세운동에 도화선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즉 삼진과 웅천의 만세운동 원조가 창원읍민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진 만세운동비


웅천 만세운동비

 


  창원 만세운동비



창원대도호부, 그리고 창원읍민만세운동과 창원읍 역사를 재조명

 정황이 전술한 바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로 나는 급격한 도시변천과정에 창원읍이 겪은 특별한 사연에서 짚어 봅니다.

 창원대도호부에서 창원군, 마산시, 진해시가 분리되는 가운데 창원읍 지역은 1973년 7월 1일까지 창원군 창원면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부터 마산시 의창동이 되었고, 1976년 9월 1일 경상남도 창원출장소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다 1980년 4월 1일 창원출장소가 창원시로 승격되면서 창원시 의창동이 되었습니다.

 즉, 구한말에서부터 창원읍은 창원군-마산시-경상남도 창원출장소-창원시로 소속이 바뀌다보니 창원읍민만세운동이나 창원읍성의 역사를 담아내는 정부기관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이제 3개시가 통합되어 옛 창원대도호부를 다시 이룬 만큼 비록 늦었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금이라도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다시 더듬어보고 우리가 무심코 간과했던 창원읍성에 대한 역사의 흔적들도 되살리고 보전하는 방법들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1920년대와 현재의 창원초등학교 모습

위 아래의사진의 둥근 표시 부분이 동일한 곳으로 추정


아이들이 공을 두고 있는 자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곳으로 추정



처음으로 개최되는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많은 참여를. . 

 여러 의미에서 올해 처음으로 개최되는 3.23창원읍민만세운동 재현행사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창원읍민만세운동은 2012년 창원시의원 이었던 김동수 의원이 시의회에서 자유발언을 통해 한번 거론되긴 하였지만 기념행사 같은 것은 없었기에 시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져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현근씨가 창원시청과 의창구청, 창원시의회 등을 백방으로 쫓아다닌 끝에 겨우 100주년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으로는 두산백과사전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지만 별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읍민만세운동의 발원지인 현재의 창원초등학교 역사 전시관에 가서 당시의 학교모습과 학생들의 사진 등을 함께 보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 글을 보는 분은 누구라도 관심을 가지고 3월 23일 개최되는 이 행사에 꼭 참석해서 창원초등학교의 전시관도 보고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재현행사에도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이버 두산백과에 나오는 내용

창원읍민 만인운동비

 昌原邑民萬人運動碑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갈 때 배중세(裵重世)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설관수(薛灌洙)는 읍내 청년회관에서 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윤호(曺潤鎬)·신갑선(申甲善)·조희순(曺喜舜)·송석민(宋錫敏)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1919년 3월 23일 창원읍내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3일 오후 2시 20분경, 공도수·송석민 등이 창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원초등학교) 대수정(大樹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사의 취지를 설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6000~7000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가 고조되자 일제 군경이 총검을 앞세워 탄압하여 오후 5시 20분경 군중이 흩어지고 3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날 검거를 피한 몇몇 주동자들은 4월 2일 장날에 다시 만세 의거를 일으켜 6000~7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1차에 비하여 더욱 강력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는 마산에서 급파된 지원 병력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20여 명을 검거하고 시위 군중을 겨우 해산시켰다.


창원읍의 만세 시위에서 주동자로 검거된 설관수와 공도수·구재균·김호원·조윤호·조희순·신갑선·사치홍(史致弘)·박화열(朴和烈) 등은 징역 6월 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공재천孔在千)·김창실(金昌實) 등은 태형 90대의 형벌을 당하였다. 후에 이들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