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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형수이자 조카를 범한 아버지 왕욱과 아들 현종

선비(sunbee) 2015. 10. 7. 16:29

  나는 학창시절 역사 과목은 가장 흥미 있으면서도 또 가장 싫어 한 과목이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어 있는 이야기들은 재미있는데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어쩌고저쩌고”하는 그놈의 암기 때문에 시험 때만 되면 진저리가 났습니다.
 세상을 60년 가까이 살다보니 느끼는 것인데 까짓 왕의 연대기 같은 아무 씨잘대기 없는 암기를 학교에서 왜 그토록 것을 강요했는지 지금도 화가 나네요.

 암튼 오늘은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에서 주관하는 이야기탐방대에 따라 갔다가 주워들었던 고려현종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을 쓰고자 합니다.
 
 고려태조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전국의 호족세력을 규합하는 수단으로 무려 29명의 부인을 얻었으며 그 부인들 밑에서 아들 25명, 딸 9명, 총34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제1왕비는 자식이 없었고, 제2왕비 아들 왕무가 고려 2대 왕 혜종이고, 제3왕비의 차남 왕요가 고려 3대 정종이고, 3남 왕소가 4대 광종입니다.
 그리고 제4왕비에는 아들 왕욱(王旭)있고 제5왕비에는 아들 왕욱((王郁)이 있는데 전자의 왕욱(王旭)은 아들 왕치(王治)가 고려 5대왕 성종이 되자 대종(戴宗)으로 추존 되었고, 후자의 왕욱(王郁)은 아들 왕순이 고려 6대왕 현종이 되자 안종(安宗)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탐방으로 찾았던 경남 사천의 고자실(학촌) 마을과 현종의 아버지 왕욱(王郁)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는 권력을 남에게 내주기 싫어 근친혼이 성행했는데 앞에서 언급한 전자의 왕욱(王旭)은 태조의 제6왕비인 정덕왕후 유씨의 딸 선의왕후와 결혼하여 아들딸을 낳아 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둘을 그의 이복 조카인 경종의 세 번째, 네 번째 비로 시집보내고,
 둘째 아들 왕치는 4대왕 광종의 대를 이은 5대왕 경종이 자식이 어린 가운데 죽음을 맞으므로 왕위를 사촌인 왕치에게 선양하는 바람에 성종이 되었습니다.

 대종(戴宗) 왕욱(王旭)의 첫째 딸 헌애왕후는 경종의 아들(후에 제7대왕 목종)을 낳아 궁궐에 살았으나 둘째 딸 헌애왕후는 자식이 없으므로 궁궐을 나가 사가에 살았습니다.
 이때 그 이웃에 안종(安宗) 왕욱(王郁)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이웃에 살면서 자주 왕래하다보니 자연스레 정분이 통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난 왕욱(王郁)과 헌정왕후 남녀 간의 족보를 따져보면 남자는 태조의 아들이고, 여자는 태조의 아들 대종(戴宗) 왕욱(王旭)의 딸이니 태조의 손녀입니다. 즉, 태조의 아들과 손녀, 즉 삼촌과 조카 사이에 정분이 난 것입니다.

 

 당시 이 일은 주변사람들이 모두 쉬쉬하여 조정에서는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욱의 노비가 왕욱(王郁)의 집에 불을 질러 이 일에 대해 위문 차 왕욱(王郁)의 집에 왔던 성종에게 고자질 하는 바람에 사단이 났습니다.
 성종의 입장에서는 헌정왕후는 자신의 친누이이기도 하고 사촌형이자 전왕인 경종의 아내인 형수가 됩니다. 이런 친누이이자 형수를 범한 삼촌 왕욱(王郁)의 파렴치한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성종에게 모든 일이 알려진 직후 헌정왕후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산고를 느껴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고, 왕욱(王郁)은 선왕의 태후를 범한 죄로 탄핵받고 경상도 사수현(지금의 경남 사천시)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왕순인데 그를 낳다가 죽은 헌정왕후와 족보로 따지자면 모자지간이면서 사촌남매간이 되는 셈입니다.

 후일 왕순은 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성종의 명으로 왕순이 궁에 들어가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왕순이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오르며 '아비, 아비' 라고 부르자 이때 성종은 ‘이 아이가 얼마나 아비가 그리우면 이토록 아비,아비 하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도록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왕순의 보모가 매우 영리하여 아이에게 의도적으로 ‘아비’라는 말부터 가르쳐 이런 계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그럴싸한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암튼 성종은 왕순을 아비의 귀향지 사천땅에 보내긴 했지만 죄인과 함께 살 수 있게는 할 수 없으므로 인근 동네에 살게 하였는데 아비인 왕욱은 사천시 사남면 성황당산 아래 마을에 살고 아들 왕손은 정동면 장산리 대산마을의 뱅잇골에 있는 배방사(排房寺)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한 때 왕실의 은덕으로 영화를 누렸다는 명찰이지만 지금은 사방을 둘러봐도 그 흔적조차 없는 배방사지-
 

 

 

 

 

 

그리고 아버지 왕욱은 아들 순을 보기위해 산을 넘어 배방사까지 매일 오갔는데 아들을 보고  해가 저물어 귀양지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사는 배방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던 고개가 지금의 정동면 학촌의 고자봉(顧子峰:아들을 돌아보는 봉우리)라 합니다.

 왕욱은 서기992년에 귀양을 와서 996년까지 귀양지에서 살았는데 어느날 임종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들 왕순에게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름난 지관을 찾아 어느 장소에 묻되 반드시 내 시신을 엎어서 묻어라.”라 하고 은밀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왕욱은 시에도 능하고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어 자신이 묻힐 명당자리를 미리 봐 두었고 시신을 엎어서 묻으면 발복이 빠르다는 것 까지 알고 그런 유언을 남겼던 것입니다.
  왕순은 왕욱이 죽은 지 오래지 않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봉해지긴 했으나 천추태후(千秋太后=왕순의 이모이자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외척 김치양(金致陽)과 사통하여 낳은 김치양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왕순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고 자객을 시켜 수차 살해하려고 하였지만 요행히도 살아나 18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니 고려8대왕 현종입니다.
((하하~~ 그러고 보면 경종의 부인이 된 왕욱(王旭)의 두 딸은 모두 인척간에 바람이 났네요)

 이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 나는 근친혼과 풍수지지리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왕욱이 아들을 되돌아 봤다는 고자봉과 학촌 마을-

 


 먼저 근친혼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겠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왕가도 여러 제국을 거느리면서 남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기 싫어 친인척간에 마구 근친혼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병약하거나 기형으로 생긴 자손들이 많이 태어났으며, 특히 합스부르크가에 유난히 많은 매부리코와 주걱턱은 지금도 유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왕욱과 헌정왕후 그리고 현종 간에 얽히고설킨 고려왕조의 가계를 보면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고, 자연의 이치는 한 치도 어긋남 없이 공평하게 굴러간다는 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조는 권력을 모으려고 무려 30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 부인들 중에는 태조 자신이 원해서 취한 부인도 있었겠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부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즉, 권력에 줄을 대려고 호족들이 누이나 딸들을 왕에게 상납하고, 왕은 호족들의 발호를 저지하는 볼모로 그 여인네들을 후궁으로 삼았지만 왕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여인네들은 이름만 왕비이지 생과부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30명의 부인 중 16명이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종족의 번식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태조가 죽은 후 39명의 자식들 중 왕위를 이어 받은 몇몇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나머지는 권력투쟁과정에 본의 아니게 승려가 되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남들과 권력을 나누는 것이 아까워 왕실의 친인척간에 근친결혼을 하였습니다.
 즉 권력을 모으기 위해 많은 부인을 얻고,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기 위해 근친혼을 하였는데 그 결과를 보자면 왕씨의 자손은 번창하지 못하고 왕권은 늘 무신권력에 휘둘리며 이름뿐인 왕 노릇을 하며 살았습니다.

 

 

 다음은 풍수지리의 효험 관한 의문입니다.
 왕욱은 죽으면서 조기발복을 위해 자신이 보아 둔 명당자리에 자신의 시체를 엎어서 매장하라고 하였고, 그 덕분에 아들 왕순이 왕욱이 죽은 이듬해에 대량원군에 봉해지고 개경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18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순이 왕위에 오르기 전 천추태후로부터  겪은 고초와 왕이 된 후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까지 피난을 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던 과정들을 본다면 과연 이것이 복 받은 인생의 모습일까요.
 내가 보기로는 왕순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묘 자리 덕분이 아니라 왕순의 타고난 자질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 근거는 그가 5~6세 나이에 배방사에서 또아리를 튼 작은 뱀을 보고 지은시와  뜻하지 않은 중이 되어 신혈사에 숨어살면서 흐르는 시냇물을 보면서 지은 시를 보면 그 기지와 역량을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작은 뱀을 두고 지은 시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붉은 비단 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네.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고 말 말게나
하루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을 걸세」

 

시냇물을 보고 지은 시
「한 가닥 물줄기가 백운봉(白雲峰)서 솟아나와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네.
바위 아래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게나
머잖아 용궁까지 도달할 물이어니.』

 

 이거는 만고 내 생각입니다만 왕순이 이렇게 큰 그릇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 왕욱의 역할이 상당하였으리라 봅니다.
 왕욱은 자신의 묏자리와 매장방법을 일러줄 정도이면 풍수지리에도 일가견을 가졌다고 할 것이고, 풍수지리에 일가견을 가졌다면 4서3경 학문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주역에도 능통하였으므로 그 학문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학식을 가진 왕욱이 유배지에서 매일 아들을 찾아가서 과연 아들 얼굴과 재롱만 보다가 돌아갔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처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아들을 교육하고 훈육하였을 것입니다. 왕순은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타고난 기지에 학문과 처세술을 더하여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고 봅니다.

 

 

 

 

 

 사천시에서는 왕욱과 왕순의 위와 같은 역사를 바탕으로 왕욱이 살았던 능화마을과 왕순이 살았던 배방사지 그리고 왕욱이 넘으며 눈물 흘렸다는 고자봉을 연결하는 길을 복원하여 이름하여 ‘부자상봉 길’을 조성하여 관광지로 만든다고 하니 산행을 좋아하는 분들은 아이들 데리고 역사공부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