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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여자와 커피, 그리고 차 이야기

선비(sunbee) 2015. 10. 19. 10:35

 세계 어디를 여행하거나, 어느 항공사를 이용하거나간에 비행기에서 기내식사를 하고나면 예쁜 여승무원이 묻는 말이 있습니다,
“커피와 차 중 어느 것을 마시겠습니까?”
 세상에서 하고 많은 음료들 중에서 왜 유독 이 두 음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문화콘텐츠진흥원과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서 주관하는 이야기 탐방대 행사에 따라 갔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전세계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차를 마시는 사람보다 많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동에 있는 매암다원의 강동호대표의 말에 의하면 세계 72억의 인구 중 차를 마시는 문화권의 인구가 40억이니 아직까지 차를 마시는 인구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세계적으로 인구가 많은 중국, 인도,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사람들은 대부분이 차를 많이 마시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커피가 성행을 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강동호대표는 6.25동란을 거치면서 원조물자 밀가루와 함께 커피가 들어오면서 미국의 자본세력에 의해 국민의 입맛이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날 매암다원에서 차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차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차와 여자, 그리고 차례와 일상다반사.
<삼국사기>의 기록에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大廉公)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어 성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초입 운수리 마을이 차시배지라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 온 시점은 신라 경덕왕(742〜765)때 활약한 향가의 대표적 작가인 충담사(忠談師)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에 모신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다가, 경덕왕을 만나 차와 향가 한수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는 기록들로 보아 적어도 7세기에는 차를 마셨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차가 번성한 시점은 고려시대로 차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를 담는 그릇인 도기도 함께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대부분 문화의 시작과 번성의 과정이 그러하듯이 차도 처음에는 왕실과 귀족들만이 누리는 호사였다가 차츰 서민들이 이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대중화 되어갑니다.
 고려사 기록에서 목종(穆宗, 997〜1009) 시대에 다점(茶店), 주점(酒店), 식미점(食味店) 같은 상점들에서 화폐이용을 허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장통에 찻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고려의 길에는 관리 등이 쉬어갈 수 있는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차가 유명한 원을 다원이라 하고 다원에서는 기녀가 차를 달여 내오기도 했으니 국영 다방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연속극을 볼라치면 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극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는 주로 커피숍이지만 사극에서는 주로 주막만 나옵니다. 지금까지 숱한 고려사극을 보아왔지만 다점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만 하드라도 새해를 맞는 설과 추수를 다한 추석에 조상들에게 올리는 예로 차를 올렸기 때문에 그 제사를 ‘차례(茶禮)’라 하고, 누구나 일상적으로 늘 차를 마시고 먹고 하므로 일상적인 일을 두고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차 대신 술과 숭늉.
 차례에 차를 대신해 술을 올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차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 가격이 비싸졌기 때문인데 조선이 불교를 배척한 탓에 사찰의 재정형편이 나빠지면서 사원 주변에 있던 많은 차밭이 관리가 안 되어 차의 생산이 줄어들었습니다.
 또 1480~1750년까지 기온이 크게 떨어진 소빙기를 맞이해 차나무가 한해(寒害)를 입어 작황이 크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청나라에 공물로 보내는 차의 수량이 늘면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라에서는 차에 대한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므로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내야하는 차 생산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양반들도 차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되고, 서민들은 차 대신 술을 차례상에 올리고 음료로 차 대신 숭늉을 음료로 마시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커피와 오봉순씨.
 나라가 있던 시절에도 기호음료가 없었는데 나라 없는 일제시대에 무슨 기호음료가 있었으며 6.25동란 후 피폐할 대로 피폐한 나라에서 무슨 기호음료가 있었겠습니까?
 원조물자에 의해 근근이 목숨만 연명하다가 1974년 경공업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대한민국국민들도 먹고살 만 해지자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여기저기에 다방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오전에 다방에 가면 커피 잔에 생 계란노란자위를 하나 띄운 ‘모닝커피’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때 커피를 주문하면 어김없이 오봉순씨(오봉을 들고 다니는 순이)가 옆에 찰싹 붙어 앉으며 “아저씨, 나도 ...?”합니다. 그러면 좀 형편이 넉넉한 중장년 노땅들은 마담까지 불러 함께 한 잔 하라며 봉순씨의 손이나 엉덩이를 은근슬쩍 주무르기도 하는 반면, 지갑이 얇은 청년들은 마뜩찮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미모가 빼어난 오봉순씨가 있는 다방에는 커피보다는 오봉순씨를 만나기 위해 출근하다시피 하는 단골고객들이 많았으니 오봉순씨가 커피 매출을 늘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할 것입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1970년대 다방의 오봉순씨가 커피의 대중화와 소비촉진에 큰 기여를 한 것처럼 고려시대 다원의 기녀 또한 차의 대중화와 소비촉진에 기여를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주(酒)와 색(色)만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 차(茶)와 색(色)도 함께 가는 모양입니다 그려.

 또 그러고 보니 차의 대중화의 방법론은 의외로 간단한 것 같습니다.
 차(茶)와 색(色)을 잘 엮어서 주색잡기에 빠진 사람들을 차색잡기에 끌어오는 것 그것이 정답 아니겠습니까?  ㅎㅎㅎ


 이날 하동매암다원에서 차시배지에 얽힌 이야기, 차의 역사 등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면서 차를 마셨는데 처음 우리는 그냥 있는 차이니까 마셨는데 두 번 우려내고 세 번 우려내고 횟수가 늘어날수록 맛이 차츰 맛이 변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떫은맛이 받히다가 다섯 번 정도 가니까 약간 단맛이 날 정도였는데 일행은 그 맛에 취해 배가 부르도록 마시고선 모두 화장실 가기가 바빴습니다. 
 그리고 나는 집에서 차를 자주 마시는 편이므로 2만5천원을 주고 차 한 봉지를 사와서 마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비린내 나는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나서 커피 말고 차를 한 번 마셔보시기 바랍니다. 입안도 개운하고 정신도 맑아집니다. 소화에 도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 모두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동의보감에 다 있는 내용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