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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명당자리 임자는 따로 있다.- 남명조식의 생가 터.

선비(sunbee) 2014. 10. 2. 09:00

 오늘은 지난 9월23일 한국컨텐츠진흥원,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경남 이야기’의 블로거 탐방대 두 번째 이야기로 남명 조식의 생가 터와 명당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풍수지리(風水地理)는 바람기운, 물기운, 땅기운의 이치로 어느 터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길흉을 맞이한다고 하여 우리네 조상들은 명당터를 두고 다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명당의 터와 그를 차지하는 주인은 마치 전기와 전구와 같이 서로 궁합이 맞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흐르는 전류는 200V인데 100V전구를 꽂으면 전구가 타버리고, 반대로 하면 전구가 작동하지지 않는가 하면 전선이 잘못 연결되어 누전이 있을라치면 화재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서로 엇갈리지 않으면서 넘침도 부족함도 없는 가운데 터의 기운과 사람이 기운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그 땅은 길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역학으로 사주를 보거나 점집에 가서 점을 치거나 간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당사자의 태어난 년.월.일.시입니다.
 아무리 명당 터가 있을지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일과 죽은 사람의 사망일이 그 터와 궁합이 맞아야 길지가 되고 발복을 한다고 합니다.
 태어나는 사람이 제가 태어나고 싶다고 임의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는 사람이 땅 기운의 시간에 맞춰 죽을 수도 없는 입장이고 보면 명당 터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명의 생가 터가 딱 그런 것 같습니다.

 

 

 

 

 남명(南冥)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曹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인데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인데 남명의 본가는 본래 판현인데 외가인  삼현 토동(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1501년 음력 6월 26일 태어났습니다.
 옛날 어느 풍수도인이 합천군 삼가면 토(兎)동을 둘러보니 암토끼가 달에 있는 수토끼를 쳐다보고 누워있는 형상이니 토끼의 배에 터를 잡은 집에서 1년 내 현자가 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토끼의 배 부분에 위치한 집이 남명의 외가였고 1년 뒤 예언대로 남명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외조부인 이국은 친자인 이씨 자손 중에서 현자가 나기를 바랐는데 하필이면 그때에  딸이 친정에 와서 해산을 하는 바람에 이씨 기운을 조씨가 앗아간 형국이 되었으니 이점이 못내 아쉬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쯤 되고 보면 명당과 그 주인공의 인연은 따로 있음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명이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세의 오늘날에 칭송을 받는 현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살아생전 일생을 되짚어보면 그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팔자를 타고났다고 할 것입니다.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당대의 퇴계 이황이 문과 회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남명은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치른 과거시험이긴 해도 문과 초시에는 급제를 하였지만 회시에는 낙방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백수 처사로  일생을 삽니다.
 넉넉잖은 살림살이에 벼슬도 없는 백수 선비의 삶이란 게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고향인 합천에서의 궁핍한 생활고 때문데 한때 김해에서 처가살이를 할 정도였으니 보통의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좋은 팔자로 산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남명의 생가-

 

 

 그렇다면 명당터의 덕을 본 당자는 터 주인인 외할아버지이숙도 아니고 이곳에서 태어난 남명도 아닌 셈인데 그럼 도대체 누가 명당터의 덕을 본 것일까요?
 내가 보기로는 결국 나라가 덕을 봤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남명 조식은 비록 공직에 몸을 담지는 않았지만 재야에서 늘 나랏일을 걱정하고 현직에 공직자들로 하여금 공직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도록 긴장케 하는 상소문 돌직구를 날려 난세에 그나마 선비정신을 유지하게 하였고, 후학들을 잘 지도하여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는 50여명이 넘는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나서게 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였으니 결국 명당터의 덕을 본 당자는 나라인 것입니다.

 

 명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와 관련해서 사사로운 내 경험 두 가지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먼저 내 아버지 산소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59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해에 따라 아버지께서 수시로 “우리가 죽기 전에 자식들한테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면 우리가 묻힐 자리는 우리가 장만해 놓아야 할 텐데...”하며 고향의 누구누구네 밭을 지목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차츰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보니 부득이 선산의 할아버지 묘 아래에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할머니께서 생존해 계시므로 아버지가 그곳에 먼저 묻히고 나면 할머니가 할아버지 옆에 묻힐 수 없다며 집안 어른들이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3일의 장례기간 안에 갑자기 산소 터를 구하려니 낭패가 예사 낭패가 아닙니다. 해서 고향을 지키고 계신 막내 삼촌한테 부탁을 하였는데 삼촌은 온 산천을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쉬었다 가자며 마을 공동묘지가의 바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아차!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하고 무릎을 치고 “바로 이 자리다!”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는 과거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를 오를 때 숨이 가빠 상여가 쉬어가는 자리였는데 공동묘지에 자동차 길이 생기는 바람에 방치된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산소를 쓰기로 하고 삼촌이 풍수가에 찾아가니 “허허~ 그 자리는 내가 안 봐도 이미 알고 있는 명당 터일세. 그 터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노인네들이 몇몇이 있는데 자네 형이 거기 묻히다니, 자네 형이 무슨 복을 얼마나 지었기에 그 터 주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네만 명당 터 주인은 따로 있다더니 참으로 그러하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부모님 산소 전경이데 경치가 하도 좋아 이곳에 서면 쉬원하면서도 편안한 기운을 느끼죠-

 

 

 내 경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나는 풍수지리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도 없고 역술인이나 풍수가들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내가 풍수지리를 어깨너머로 공부하고 이해하는 명당은 햇빛 잘 들고, 통풍 잘되고, 경치 좋고, 비바람으로 인한 재해가 없는 자리가 명당이라고 여기는 편이고 이런 관점에서 내가 사는 집터를 고르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7년 전 내가 사는 집 일부가 공공사업에 편입되어 대지 100평 중 40평이 편입되고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대지가 협소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 볼까하고 귀산동 일대 땅을 물색하다가 석교마을에 있는 적당한 땅을 발견하고 그 동네 사람에게 그 터를 살 방법이 없겠냐고 타진을 해 보았습니다. 그 터 주인은 현재 엄청난 부자라서 땅을 팔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포기를 하고 결국 내가 살던 터에 집을 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터에 집을 짓고 있어 이 어찌된 영문인가하고 알고 보니 터 주인이 마을노인회관부지로 내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명당 터가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을주민 공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참으로 다행하고 신통한 일이다.” 라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두 경험에서 소위 명당 터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리 명당 터에 묻혔다고 하지만은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불행한 명운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토록 팔지 않겠다던 명당 터가 어찌 욕심  없는 마을 공동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사람의 운명도 땅의 운명도 모두가 하늘의 뜻이 아닐까요?

 남명의 외할아버지 이숙처럼 기왕이면 내 자손이 번창하였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진 이나,

 조상 산소 덕으로 부귀영화를 기대하는 이나,

 내가 명당을 찾기보다는 명당이 나를 찾도록 선을 행하고 복을 지음이 어떠할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