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

남과 여. 로망과 로맨스. 그리고 세컨하우스

남과 여. 로망과 로맨스. 그리고 세컨하우스 자세히보기

여행

임진왜란 일본 패인은 이순신보다 곽재우다.

선비(sunbee) 2014. 10. 6. 08:00

 한국컨텐츠진흥원,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경남 이야기’의 블로거 탐방대 두 번째 스케줄로 9월30일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에서 육상전투에서 최초 승리를 거둔 의령의 기강과 정암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이 아니라 곽재우 장군의 민병이었다는 사실이고,
 둘째, 만우당 곽재우 장군하면 지금까지 무인인줄 알았는데 그는 시를 쓸 정도의 문인이고 선비였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영화 “명량”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열기가 전국을 달구고 있습니다. 나도 2년 전부터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을 약칭하여 ‘이배사’라는 모임에 참여하여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그래서 이순신 장군을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유일신쯤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여행 가이드를 해준 의령군청의 윤재환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일본이 전쟁에 패한 가장 큰 요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곽재우는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지만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하고 농업경영을 하고 살았습니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기록한 만큼 그는 구두쇠 소리를 들을 만치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며 재산을 모았는데 아마도 머지않은 장래에 큰 위난이 올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데 비해 그는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이 군량미를 얻기 위하여 전라도 곡창지대로 향하던 길목인 기강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때 그가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은 재산을 의병들의 가솔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백성들은 “난리 통에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매한가지니 처자식이나 배불리 먹고 살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의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1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5월 4일 기강 전투에서 첫 승리를 하고보니 이래저래 모여들기 시작하여 의병이 2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전란동안 그 많은 장졸들을 먹이고 입히자니 자신의 재산은 말할 것도 없이 친가, 외가, 처가의 재산까지 거들 냈으니 그의 친척들은 그를 마뜩찮게 여길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암튼 이렇게 하여 군량미를 얻기 위해 전라도로 향하던 왜군은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해군이 길목을 막고, 육지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곽재우 장군의 민병에 의해 길목이 막히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가 전쟁의 패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을 꼽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해군은 그나마 군대라 치더라도 육지에서는 관군은 썩은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일시에 조선천지를 소탕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조직에도 없는 민병이라는 것이 나타나 발목이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도 발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히면 걸음을 절룩거리듯이 파죽지세로 치고 나가던 10만의 왜군이 곽재우의 민병에 의해 발걸음이 무겁게 된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있는 것은 도요토미로서는 정부조직에도 없는 민병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곽재우 장군이 휘두르는 게릴라전술은 어느 병법이나 전술에도 없는 신출귀몰한 전술을 구사하므로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도요토미가 인정한 조선의 으뜸 장수이건만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재산과 인척들의 재산까지 나라에 바쳐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 썩고 부패한 조정의 관료들에 의해 그 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기에 지금까지도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연속극 등이 숱하게 있었지만 곽재우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연속극은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에 성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 성웅 곽재우 장군이 있었음을 상기하는 영화 또는 연속극들이 만들어져 곽재우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루지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