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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엿보기

6.4지방선거와 절집 고양이 죽음.

선비(sunbee) 2014. 1. 20. 10:00

6.4지방선거와 절집 고양이 죽음.

 

 옛날 절에서는 곡식창고의 쌀을 도둑질하는 쥐를 쫒기 위해 고양이를 길렀는데 동쪽 선원의 스님들은 동당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원의 스님들은 서당 고양이라며 수시로 다투었습니다.
 이를 본 조실스님인 남전화상이 운집종을 쳐 법당에 대중들을 모은 후 고양이와 칼을 양손에 들고서 “이 고양이에 대해 바로 이를 것 같으면 고양이를 살려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칼로 두 동강 내리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당고양입네 서당고양입네 하고 그토록 우기던 대중들 중 누구도 답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 내어 법당에 팽개쳐버리고 조실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녁때 외출에서 돌아온 수제자 조주선사에게 낮에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대가 만약 낮에 그곳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겠는가?”라고 하자 조주선사는 말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이를 보고 남전화상은 “만일 그때 그대가 있었던들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하고 아쉬워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조주선사의 신짝을 머리에 이고 간 뜻을 아시겠습니까?

 

 

 

 

  금년에는 지방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주장하는 바들을 보면 어째 이리도 고양이 싸움들을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만물과 드러나는 현상은 고유의 본성과 그 발생원이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 본 바탕은 보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고 체득한 알음알이를 기준으로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상은 아집을 낳고, 아집은 분별심을 키우고, 분별심은 분노로 이어져 스스로 한 쪽씩의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난해 경남의 가장 큰 분쟁거리였던 진주의료원 폐업만 봐도 그렇습니다.
   보수와 경영자 쪽에서는 근로자 탓으로, 진보와 근로자 쪽에서는 경영자의 탓으로 서로 그 책임을 미루며 자기의 주장들만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솔직하면 자기허물은 자신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아는 법입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보면 양쪽의 허물이 다 보이건만 정작 당사자들은 자기허물은 보지 않고 상대방 허물만 들추어 네 탓, 내 탓 하고 다투고 있는 통에 애꿎은 환자들만 희생을 치렀습니다.
 새해에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 비난하기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먼저 고백하고 상대의 이해를 구하는 쪽으로 마음들을 돌렸으면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 죽음 하나를 두고서도 분쟁거리를 만들자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죽인 남전화상을 두고 한 쪽에서는 “생명은 똑 같은 생명인데 살생을 금하는 법당에서 제자들 교육을 위해 굳이 축생을 살생한 점은 교육적으로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으므로 남전화상은 잔혹한 살생자이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쪽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로 수백 명의 인간을 제도할 수 있다면 고양이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으며 살생을 한 남전화상은 승려로써 감당하기 어려운 살신성인의 자비보살행을 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죽음에 있어서도
 “생명을 잃은 것은 고양이이므로 고양이만 죽었다.”
 “고양이를 죽게 한 원인제공을 선승들이 먼저 죽었다.”
 “살생을 한 남전화상이 가장 크게 죽었다,” 
 “부처님의 계율도 지켜지지 않았으니 불법도 죽었다.”
 등등으로 끝도 없는 시빗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논쟁을 만들기보다는 근본 바탕을 바로 봤으면 합니다.

 위의 고양이 죽음에 있어 내가 보기로는 이들은 모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지금 우리에게 생생한 불법을 전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불가에서는 생이 곧 멸이요 멸이 곧 생이며, 어둠 속에 밝음이 있고 밝음 속에 어둠이 있으며, 삼라만상은 공한 가운데 생생하게 현전하여 각각의 인연 따라 그 진리를 우리 앞에 보이기도 앗아가기도 한다합니다.

 즉, 우주의 세계에서 보면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그 순간 당체의 허물만 드러나고 죄업만 지은 것입니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가짜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내편이 내일은 상대편이 될 수도 있음에 만사를 중도의 안목으로 대하는 지혜를 가졌으면 합니다. 

 
  이 고양이 이야기기는 불가에서 선승들 선문답으로 흔히 회자되는 공안 중의 하나인데 선거철이 다가옴에 또 우리 지역사회가 동당입네 서당입네, 또는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편 가르기를 할까봐 잠시 빌려와 이야기 합니다.

 

 

 

 서두로 돌아가 조주선사가 신발을 머리에 이고 간 뜻을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은 본래의 때와 장소를 따라 원융자재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고양이는 쥐를 잡는 역할만 할 뿐인데 사람들이 공연한 사량 분별심으로 동당고양이, 서당고양이 하며 터무니없는 억지 짓을 하고 있으니 이를 빗대어 조주선사는  발에다 신는 신발을 머리에다 이고 가는 황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바라건대 이번 선거에서는
 “서당 고양이 죽여라!” “동당 고양이 죽여라!” 하는 구호 대신 “고양이를 보라! 고양이를 보라!”하는 구호를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조주선사와 같이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비워서 국민의 마음을 잘 쓸어 담을 줄 아는 정법안목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를 뽑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한마디는
 “어이 할거나! 어이 할거나!
 곳간의 쌀은  흔적 없고 들쥐들만 끓는구나!
 고양아~ 고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