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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씹어 볼만한 글

동곽선생

선비(sunbee) 2009. 9. 11. 10:07

동곽(東郭)이라는 서생(書生)은 고집에 가깝게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도움 안 되는 독서에 열중하고 생각은 늘 고루하기만 하다. 어느 날 그는 중산국의 숲길을 걷다가 피를 흘리며 쫓기는 늑대를 만난다. 늑대는 "선생 보따리 속에 들어가 숨어 있을 테니 사냥꾼 좀 따돌려 달라"고 애걸한다. 성정(性情)이 '무분별하게' 어질기만 한 동곽 선생은 늑대의 몸집을 줄이기 위해 끈으로 묶어야 보따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도 낸다. 보따리 속에 들어간 늑대는 바로 뒤를 이어 들이닥친 사냥꾼을 피한다. 이야기는 다른 한 상황으로 접어든다. 위기를 모면한 늑대는 안면을 바꾼다. "은혜를 베풀었으니 마저 베푸는 게 어떠냐"며 동곽 선생을 잡아먹으려 든다. 위기에 처한 동곽 선생은 길을 지나는 농부에게 도움을 청한다. "판단이 잘 내려지지 않는다"며 농부는 처음의 상황을 재

연(再演)하도록 둘에게 요구한다. 동곽 선생은 처음처럼 늑대를 끈으로 다시 묶고 자신의 보따리에 우겨 넣는다. 새로운 인물의 가세로 상황이 불리함을 느낀 늑대도 이에 순순히 따르고 만다. 농부는 보따리에 들어간 늑대를 때려 죽인다.

독자들의 예상을 넘어서지 않는 얘기 구조다. 하지만 농부는 동곽 선생에게 "야수의 성정은 고쳐지지 않는다. 당신이 늑대에게 인자함을 베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훈계를 남긴다.

상황의 본질을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일관하는 거짓 인자함에 대한 풍자다. 동곽 선생은 그래서 요즘도 중국에서 '무분별한 시혜자'로 인구에 회자되곤 한다. 우화는 추상적 관념들을 사람이나 동물.식물을 빌려 설명한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과장이 섞여 들 수 있지만 본질에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산뜻함이 있다.

북한 핵의 상황이 갈수록 꼬인다. 미국이나 중국 등 한 다리 건넌 관련국의 입장은 명확하지만 우리 안에서의 자중지란이 심각하다. 외교 라인은 북 김정일의 발언 하나를 두고 혼선을 빚는가 하면, 고위 안보 관계자는 현재 상황에 닿지 않는 발언으로 동맹인 미국을 자극하고 나선다.

늑대에 대한 인지력(認知力) 부족, 사냥꾼의 존재에 대한 망각, 자신의 시혜가 지니는 부적절성에 대한 무지…. 골고루 다 갖춘 한국 정부는 영락없는 동곽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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