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건축월간지 책에 작품이 자주 소개되기도 하던 마산의 배동권이라는 유명한 건축사 한 분이 계신데 그 분께서 하는 말씀이 “내 집을 3달을 두고 설계하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건축설계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자기 집 하나를 설계하는데 석달이나 걸릴 것이 뭐 있겠나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 건축가 중에는 단독주택 설계를 의뢰 받으면 직원을 적어도 6개월 정도 건축주 집에 살거나 이웃에 생활하도록 하여 그 지역의 기후, 차량과 사람의 활동 빈도와 동선의 흐름, 건축주와 가족의 취향 등등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주택 설계에 반영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설계비는 엄청 비싸지요. 건축비보다 설계비가 더 비싸게 치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요?
내가 내 집을 설계하다 보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어머니의 요구조건, 아내의 요구조건, 나의 취향이 각각 다르므로 여기서부터 고민은 시작됩니다. 각자의 취향과 생각이 다르니까요.
건축학에서 흔히 건축의 3대 요소라 하면 기능, 구조, 미라고 대체로 정의합니다.
기능은 생활에서의 편리함, 쾌적함 등이 있을 것이고 유지관리 측면에서 냉난방의 효율성과 수리나 보수의 편리성 등이 있을 것입니다.
구조는 태풍이나 지진 등 자연재해로부터의 안전성, 건물 자체의 적재하중이나 화재로부터의 안전성 등이 있을 것입니다.
미는 건물 밖에서 보는 외관이 있고 건물 내부에서 보는 인테리어 개념의 내부 미관이 있을 것입니다.
집은 이 3대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어 쾌적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울 때 비로소 좋은 집이라 할 수 있는데 설계를 하다보면 이게 그리 쉽지를 않습니다.
기능면의 편리함을 쫓다보면 구조의 안전성에 문제가 생기고, 구조의 안전성을 쫓다보면 미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등등으로 상호 충돌요소가 곳곳에 있지요.
단순히 기능면에서만 보드라도 한정된 공간 속에서 주부의 편의를 위해 주방을 남쪽에 배치하면 큰방이 북쪽에 가야하고, 현관을 남동쪽에 두면 좋은데 거실의 전면부가 좁아지고, 큼직한 다용도실 하나쯤은 있으면 좋은데 그러자니 화장실이 좁아지고.....
거기다 집지을 돈은 한정되어 있어 돈에 맞추다 보면 기능도, 구조도, 미도 모두가 그림의 떡이 되고 말지요.
건축의 3대 요소 이전에 1대 요소를 뽑으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쩐일 것입니다. 쩐이 충분한 다음에야 공간도 크게, 구조도 안전하게, 모양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겠죠.
나의 경우는 쩐이 짧으므로 기능은 3가족의 공통분모로 최대한 함축하고 구조와 미에 있어서는 구조체가 미이고 미가 구조체가 되는 방안으로 건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냉난방의 에너지 절약을 위해 냉기는 땅에서, 온기는 지붕의 열기를 최대한 이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만 실제 효과는 결국 살아봐야 검증이 되겠지요?
내가 살 집의 평면도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현관의 위치가 보통의 집들에서는 동남쪽 또는 전면에 배치하는데 그 이유는 풍수적으로 동남쪽의 생기 있는 기운을 집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이유도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물전면에 치장을 많이 하므로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 집의 풍모를 과시하고 싶은 일종의 과시욕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에 나는 현관을 북동쪽에 배치하였는데 그 이유는 거실의 전면부 시야를 많이 확보하는 장점도 있고, 현관이 거실 앞쪽에 있으면 거실로 동선이 많이 지나가므로 독립된 공간의 기능도 못하고 가구의 배치 같은 것도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주방의 위치인데 사실 제일 고민을 많이 한 부분입니다.
가족 중에 집에 가장 많이 머무르는 사람이 주부이고, 주부가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곳이 주방이므로 주방을 가장 좋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리적인 건축계획일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실과 나란히 남쪽에 배치하고 거실과 오픈 공간으로 구상을 하였습니다만 아내가 “음식냄새 나는 것이 뭣이 좋다고 그런 소리하느냐!”는 핀잔을 주므로 북서쪽에 독립된 공간으로 배치하면서 대신 지붕 경사를 이용하여 천창을 통해 남쪽의 일조와 통풍이 유입되도록 설계하였습니다.
방은 우선 어머니를 모셔야 하고, 어머니 방이 우리 내외 방보다 작으면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므로 일단 방 둘은 크기를 똑 같이 하였습니다. 설계도면을 가지고 이방은 어떻고 저떻고 해봐야 어머니한테 먹히지도 않을 것이고 하니 집이 다 된 다음에 어머니께 당신의 거처를 먼저 선택하게 하고 나머지 방을 우리 내외 방으로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방에 따른 화장실과 전실을 남쪽에 배치한 이유는 단독주택은 아파트와는 달리 아무래도 보온에 불리하므로 화장실이 북쪽에 있을 경우에는 겨울에 화장실에 들어가면 추워서 샤워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남쪽에 배치하고 바닥 타일도 검정색으로 하여 겨울에는 햇볕으로 검정타일을 데워서 적어도 초저녁까지는 그 열기로 화장실을 따뜻하게 하려는 생각입니다.
거실의 전면부와 후면부에는 모두 창문을 설치하였는데 우리나라 여름철 기후는 낮에는 데워진 대기의 압력으로 저지대 강이나 바다에서 산으로 바람이 불고, 밤에는 식은 찬 기운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일정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름밤에 가장 더운 시간대가 저녁 8시에서 10시 무렵인데 대지의 복사열과 하늘에서 식은 찬 공기가 서로 팽팽하게 힘을 겨루는 시간으로 이때는 바람 한 점 없이 무덥지요.
우리 전통 한옥들을 보면 남쪽에는 큰 창이 북쪽에는 작은 창이 있어 바람이 마주 통하도록 지어져 있습니다. 남쪽에서 부는 바람은 바람의 량은 많아도 별로 시원하지가 않는 대신 북쪽의 바람은 작은 량에도 기온이 낮은 바람이므로 매우 시원하기 때문에 이런 기후적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어진 건물이 우리의 전통건물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6.25동란, 그리고 인류역사상 가장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전통주택들에 대해 잊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느 침대 회사에서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카피를 썼는데 나는 “전통주택은 자연과학입니다”라고 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건물들을 대충 둘러보면 눈이 많이 내리는 스위스 같은 나라는 지붕의 경사가 급하고, 열기가 많은 중동지역의 나라는 건물 색상이 하얗고, 돌이 많은 나라인 그리스는 석조건물이 많고, 습기가 많은 동남아 지역의 건물은 1층은 창고나 축사로 사용하는 등 전통 건물을 보면 그 나라의 기후와 자연생태를 대충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주택은 우리나라 기후와 자연조건에 가장 적합한 구조로 진화해 왔다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후는 사실 인간이 적응하기 매우 까다로운 조건의 기후라 봅니다. 여름에는 지긋지긋하게 더운 반면 겨울에는 따끔따끔하게 추운 기후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더위와 추위를 모두 감당해 내야 하는 건물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했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의 우리 전통 건물인 것입니다.
나는 매미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 하루 종일 경남도 내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는데 창원과 장유신도시에서는 철구조로 된 아파트 지붕과 창문은 물론이고 집안의 냉장고마저도 날아가는 난리가 났는데 농촌의 자연부락 흙담벽 위 엉성한 나무서까래가 걸쳐진 슬레이트 지붕의 헛간들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바닷가의 피해지역 중에서 가장 심한 곳이 마산의 매립지이고 진해 용원의 매립지였습니다.
나는 누가 집터를 봐 달라고 하면 그 집터 또는 그 주변에 오래된 감나무나 대나무가 있는지 혹은 예전에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의 축대나 사기그릇 파편들이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전에 집을 짓고 살았던 터라면 홍수나 태풍과 같은 재해로부터 일단 안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풍수지리의 음택과 양택의 오묘한 진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바람은 물과 땅의 기운으로 생기를 얻고, 물은 바람과 땅이 품고 있으며, 땅은 바람과 물의 흐름에 따라 형이 변하고 성분이 변한다는 이치와 이런 이치를 무시하고 집을 지으면 자연재앙을 맞을 수 있다는 정도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본 여러분이 혹여 집을 짓는다면 이런 점을 한번쯤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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