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예술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10.04 손끝에서 마산의 부활을 보다 (4)
  2. 2012.10.02 창동예술촌에서 공돌이와 보헤미안의 합궁이 궁금하다. (5)
  3. 2012.09.25 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13)

손끝에서 마산의 부활을 보다.

 

 창동예술촌 팸투어 3번째 이야기입니다.

 창원시는 창동, 오동동 상권을 살리기 위해 도로를 정비하고, 골목길 벽면에 벽화와 조형물을 설치하고, 공연장과 주차장을 만드는 등 도시 인프라 구축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였습니다.   또한 빈 점포를 빌려 예술가들에게 제공함으로서 예술가들이 마산의 도심에서 둥지를 틀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토.일요일에 예술가들을 거리로 불러내 각자의 작업과정을 시민들에게 체험하며 작품을 판매도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리마켓행사를 하고, 청소년 길거리 공연 등을 개최하였습니다. 다행히 행사가 거듭되면서 차츰 시민들의 반응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번 창동예술촌 블로거 팸투어에서 블로거들도 20여명이 회화팀, 조각도예팀, 공예팀, 잡탕팀으로 편을 갈라 각자 자기 관심분야를 취재하였습니다.
 나는 여성들블로거들에게 찜 당하여(역시 나의 여성들에게 인기는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ㅋㅋㅋ)  여성 세분과 공예팀에 참여했습니다.

 

 처음 간 곳이 주순희 작가의 ‘熙아트’입니다.
 이 곳에서는 각종 보석과 액세서리를 수제로 만드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상품이 그러하듯이 공장에서 똑 같은 제품을 대량생산하여 대량소비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보면 나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 나와 똑 같은 가방을 든 사람, 나와 똑 같은 목걸이를 한 사람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제품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니 비록 비슷할 수는 있지만 결코 같을 수는 없는 물건입니다.

 인터뷰 중 주순희 작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가게들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하는데 일단 그 제품과 자신의 물건을 써보고 평가를 해 달라고 한답니다. 사람들은 싼 제품과 자신의 제품을 사용해 보고서야 비로소 단골손님이 되는데 결국 이 가게는 그런 단골손님이 주 고객이라고 합니다.
 그는 또 다른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 “예전에는 각종 오브제를 내 방식으로만 보았는데  창동예술촌에 오면서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아~ 저렇게도 사용할 수 있구나!’라며 새로운 영감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어 좋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조각가, 회화가, 공예가 등의 예술가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오브제를 다루는 기술과 예술적 영감 등에서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음입니다.
 

 

 

 

-주순희 작가는 우리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열심히 뭔가를 갈고 있었는데 소위 원석을 갈아 칠보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위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다루기 힘든 이렇게 험한 노가다 장비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박정원 작가의 ‘박정원 초크아트’입니다.
 사실 나는 직장생활 할 때만 하드라도 1년에 한번 정도는 국전이나 유명 미술전시회를 다닐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아 미술의 장르나 소재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초크아트는 처음 대해보았습니다.
 동양화나 수채화는 붓이 일단 한번 지나고 나면 덧칠로는 수정이 불가합니다. 대신 유화는 덧칠은 가능하지만 먼저 칠한 액체상태의 물감이 말라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초크아트는 유성고체이므로 바로 덧칠이 가능하기에 유화 한 점을 그리는데 2개월이 걸린다면 초코아트는 두 시간 만에도 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즉석체험도 가능하므로 이날 실비단님은 2만원을 내고 선인장 그림 한 작품을 30분 만에 그렸는데 식탁이나 안방 화장대 앞에 걸어 놓으면 꽤 괜찮을 듯한 작품이었습니다.

 

 

 

 

-실비단님의 체험작품입니다. 멋지지 않나요?

 

 세 번째로 정혜경 작가의 ‘MOOL GLASS'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유리제품 하면 두산유리나 한국유리 공장에서 만든 술병이나 컵 정도로 생각하지 수제로 만든 공예품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유리공예를 구경하는 기회는 기껏 TV 방송에서나 보는 정도이지 우리 생활주변에서 직접 유리공예를 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나 제조과정을 구경하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MOOL GLASS'에서는 이런 보기 드문 유리 공예품을 만들고 체험하는 곳인데 이날 블로거 달그리메님과 커피믹서님은 각각 자신이 디자인 한 목걸이 하나씩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정혜경 작가는 이날 길거리 프리마켓에서도 간단한 유리작업을 시연했는데 700℃가 넘는 고열에 유리를 녹이는 작업은 어지간한 인내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달그리메님과 커피믹서님이 자신들의 목거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프리마켓에서 온 정신을 집중하여 유리를 녹이고 있는 정혜경 작가-

 

 

 마지막으로 이정희 작가의 ‘부용청주상회’입니다.
 청주상회라고 하니까 청주를 파는 상회로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만 청주는 팔지 않고 주로 천연염색한 수제로 만든 천제품을 파는 가게인데 커피와 과일 정도의 가벼운 다과도 겸해서 판다고 합니다. (가게의 내력이 궁급하신 분은 실비단님의 글를 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mylovemay/15533998  )
 사진에서 보듯이 이정희 작가의 작품은 한지나 천을 가지고 의상, 커튼, 의자커버, 등커버, 등 우리 일상용품을 자신이 디자인 하고 염색하고 제조하여 만든 수제품들입니다.
 실제로 이 가게에 있는 평상, 의자, 우편함 등의 가구는 투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물건들입니다. 이런 물건들이 그가 만든 천과 종이들의 질감과 색감과 어우러지면서 아주 편안하면서 맛깔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양산까지도 자신이 만든 천으로 멋을 부렸습니다.

   

 길거리 프리마켓을 보실까요.
 프리마켓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창동예술촌에 입주한 작가들도 있지만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기업에서도 간단히 체험할 수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나와 지나는 길손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나는 창동예술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행위와 현상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마산의 경제를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수제산업’의 선점이다.” 
 
 되돌아 보건데 근래 들어 우리나라는 오로지  첨단산업, 고부가가치 산업, 글로벌 기업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며 모든 국가정책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삼성이나 현대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더 높이기도 하고 몇 십조의 외화를 벌어와 국가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큰 나무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는 서민과 중소기업들은 싹조차 말라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만 하드라도 우리나라 경제는 주로 수공업과 경공업에 의존했습니다. 가발공장과 신발공장과 보세의류공장이 엄청난 고용창출을 하였고, 가정에서는 이쑤시개 장식 붙이기, 크리스마스추리 전구 끼우기 등의 부업으로 손을 놀리는 국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상황이 그러했기에 비록 고만고만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빈부의 격차가 그리 크지도 않았고 일자리 없다고 불평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 고도화, 자동화, 대형화 되면서 일자리는 줄어들고, 고부가가치산업이 아닌 업종은 인건비가 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에게 밀려남으로서 중소기업과 평범한 기능 보유자는 삶의 터전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자본주의 국가가 겪는 필연적 과정이고 마산의 흥망성쇠도 이와 괘를 같이 하므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처지도 못됩니다. 

 

 문제는 지금부터라고 봅니다.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굳이 첨단을 달리는 스마트폰이나 자동차만이 아니라 스위스의 맥가이버칼이나  손목시계와 같이 작고 오래된 산업이지만 인류의 역사와 영원히 같이 할 생활용품을 시대에 맞는 디자인과 품질로 진화해 가도록 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세계 제일의 예능적 감성과 손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싸이나 소녀시대의 K팝열풍과 세계기능올림픽 26회 대회 중 17년 종합우승한 업적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산의 과거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산상권이 한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부림시장이 과거 서부경남의 도매시장으로 오늘날 전국의 남대문시장적 역할을 하였고, 또 하나는 전국에서 유명했던 목형공장이였습니다.
 북마산 가구골목이 과거 목형을 깎던 곳입니다.
 (목형은 흔히 일본말로 로구로라 하는 것으로 계단손잡이나 가구의 둥근 장식목재를 말하며 순전히 내 짐작입니다만 마산공장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여건으로 일찍 개항을 하였기에 일본인들이 먼저 로구로기계를 빨리 들여온 연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가구도 그렇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제품을 가지고 지역소매상들이 홈쇼핑이나 대형유통업체를 상대로 경쟁해서 살아남기는 어렵습니다.
 살아남는 길은 요즘 유행하는 맞춤가구, 기능성가구를 제작 판매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봅니다. 서울의 업자가 가구 하나 팔겠다고 창원에 실측하러 오고, 설치하러 오지는 못할 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원시 당국에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창동예술촌 사업을 예술인들끼리 모여 밥이나 먹고 술이나 마시는 장소보다는
 예술인과 기능인들이 함께 모여 수제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창조해가는 모태공간으로 개발하는 발상의 전환을 꾀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들이 단순히 사무를 보고 영업을 하는 가게의 개념보다 그들이 이곳 창동과 오동동에서 창작 작업을 할 수 있는 공용작업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작가들이 일시적으로 하는 퍼포먼스나 행사가 아닌 창작활동의 일상이 시민들에게 늘 구경꺼리가 되고  체험꺼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기위해 예술촌을 떠나지 않으므로 그 자체로 소비시장이 생기고, 창동에만 가면 언제나 예술활동을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가 사람들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새로운 영감들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예술작품과 생활용품을 창조해 갈수 있을 것입니다.  

 

 창동예술촌을 세계최초의 도심형 수제산업단지로!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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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2.10.04 16: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제산업의 메카라는 단어가 귀어 쏙 들어오는군요.
    인근의 수제 한복 등과 어우러지면, 더 확장 발전될 가능성도 있군요.
    잘 보고 갑니다.

  2. 장목산 2012.10.04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엇이건 사람이 모이는 문제가 시급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무엇이건 됩니다.
    돼요...

창동예술촌에서 공돌이와 보헤미안의 합궁이 궁금하다.

 

 마산에 살던 지금의 50~60대 사람들은 대부분 창동, 오동동 골목에서 데이트 한번쯤은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극장, 서점, 화랑과 그리고 예인들이 자주 찾는 주점과 다방들이 즐비하였던 곳이 이곳이고 마산, 창원의 연인들이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하면 이곳 말고는 딱히 갈 곳도 없었습니다.
 
 이 시절 경남의 시골 각처의 내 또래 동란 베이비들은 수출자유지역 또는 한일합섬 직장을 찾아 마산으로, 마산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온 그들에게 오동동과 창동의 밤거리는 생경한 풍경이요 그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지요.
 하여 이곳은 한때 땅값이 서울의 강남 다음으로 비싸고 길거리는 어깨가 부딪쳐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사람이 붐비는 거리였습니다.

 

 

-과거 시민극장이었던 건물입니다.

 1970~80년대 마산에서 연애했던 사람이면 열에 아홉은 아마도 이 극장에서...

 

 

 

 하지만 90년대 접어들어 200만호 주택건설 정책으로 마산에 비해 땅값이 싼 창원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고, 마산에서 살만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창원으로, 창원으로 이삿짐을 싸면서 마산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이런 과정에서 마산의 위정자들은 아파트만 많이 지으면 도시가 살아날 것으로 생각했는지 한일합섬과 한국철강과 같은 기업들을 들어내고 대단지 아파트부지와 상가부지로 변경해버렸고, 그 결과 마산시민들은 일자리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일자리가 없으니 소득이 없고, 소득이 없으니 소비할 돈이 없고, 소비자가 없으니 장사가 되지 않고, 종국에는 지역이 슬럼화 되고...
 이런 흥망성쇠의 도시역사는 세계의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반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흥망을 함께한 마산과 같은 도시는 세계의 도시역사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나는 9월21일 창동예술촌 팸투어를 하면서 오동동 뒷골목과 부림시장 곳곳을 둘러보았는데 창동 4거리를 중심으로 프리마켓 행사장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사람구경, 거리구경을 한 셈입니다.

 

 

-창동의 거리 풍경입니다.

 

 어지러웠던 전선을 지중화 하고 벽화와 조형물로 골목길을 새단장 하였습니다.

 

 

 

 

 

프리마켓 행사장 풍경입니다. 청소년들이 많이 모여 거리가 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이페인팅 아티스트 배달래님입니다. 자신의 그림을 넣은 T를 2만원에 판매했는데 이 T는 결국 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부림시장의 경우 입구에 있는 먹자골목까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의 그림자가 한산해지면서 셔터를 내린 빈 점포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2층엘 올라 가보니 오가는 손님들은 눈을 씻고 봐야 보이지 않고 가게 주인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틀어 놓은 라디오, TV 소리들만이 적막을 비집고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게 아주머니들에게 “창동예술촌 프로젝터사업 이후 변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프리마켓 행사가 있은 후부터 그 주변에는 사람이 끓지만 우리와는 무관한 것 같다. 몰라~  앞으로는 어찌 될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감이나 그들이 말하는 상황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부림시장의 풍경입니다.

 입구에 있는 먹자골목에는 20년, 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주전부리 집이 즐비합니다.

 

 

 

시장 안쪽에는 셔터 내린 점포가 즐비합니다.

 

 

 

2층 의류매장의 마네켕들이 마치 나를 향해 도열해 있는 듯 합니다. 실물 미인들이 진짜로  이렇게 나를 마중한다면 ...ㅋㅋㅋㅋ 

 

 

 

 마산의 도심 슬럼화 현상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연스런 도시현상인데 그 속도가 눈에 띄게 너무 급격하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역전시켜보고자 인위적으로 시도해 보는 고육책의 도시재생상업이지만 투자대비 효과는 사실 장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예술촌이랍시고 골목길을 단장하고 곳곳에 조형물 몇 점 갖다놓았다고 해서 그 골목을 예술의 거리라 하기에는 낮 간지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좀 뭣한 이야기이지만 창동예술촌에서 썩 유명한 작가를 만날 수를 있거나, 유명한 작품 한 점이라도 감상할 수 있는 형편이 아직은 못됩니다.
 그렇다고 기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까닭은 이 곳에 입주한 작가들은 나름 열심히 작업들을 하고 있고, 프리마켓행사와 같은 행사를 통하여 시민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서 예술에 대한 공감대와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 것만으로도 예술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매립하고, 도로를 만들고, 아파트를 짓는 물리적인 문물을 만드는 것은 1년 혹은 10년의 짧은 시간 내 가능하지만 무형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적어도 반세기 정도의 세월이 흘러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가 창원입니다. 1974년 이후 창원은 급속한 도시발전을 하였지만 2000년 전 까지만 하드라도 갤러리나 소극장 하나가 없을 정도로 문화의 불모지대였습니다. 그러다 2010년 정도에 들어서야 비로소 갤러리와 소극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40여년 세월동안 인구 10만 미만의 도시가 50만이 넘는 대도시로 급성장하였지만 문화는 이제사 싹이 돋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창동예술촌을 바라보는 시민들이나 이 프로젝터를 주도하는 공무원들이나 조급한 마음에 하루빨리 가시적인 성과를 바라겠지만 이 일은 결코 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도시재생사업을 설명하고 있는 창원시 도시재생과 김용운 과장

 

 

 팸투어 과정에 몇몇 작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돌이(공무원 속칭)들의 사고와 자신들의 사고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있어 대화가 안 된다며 속에 천불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안 봐도 뻔 한 동영상입니다.
 공돌이들의 속성은 선례가 없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려 하고 격식과 절차를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인 반면, 예술인들은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격식과 절차 같은 구질구질한 것은 딱 질색인 집단이고 보면 이 둘의 집단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런 상극의 집단이 서로 머리를 맞대는 것 자체가 서로 피곤하고 짜증스런 장면입니다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사업을 담당하는 창원시 도시재생과 김용운 과장의 마인드가 공돌이 중에서는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지금까지 한 사업은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은데 지금의 상황을 가지고 쓸데없는 예산만 낭비하였다며 예단하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검정 양복과 흰 와이셔츠의 틀에 박힌 공무원과 보헤미안적 예술가 집단의 합궁이 이루어지는 이곳 창동예술촌에서 옥동자가 나올지 사생아가 나올지 지켜볼 일입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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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2.10.03 0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본적인문제를 덮어두고 전시성으로 살리기를 하면 빤짝 거품일뿐입니다.
    바다 메우기나 억지 투자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살리기가 아니라고 봅보니다.

  2. 장목산 2012.10.03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비님 다운 진단을 하시는 구려.
    추석은 잘 지넸지여.~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해야할 일이라면
    최선을 다 하는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창원시...
    창동예술촌...
    화이팅.!! 입니다.

    • 땡삐 선비(sunbee) 2012.10.04 1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리도 불편하신데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작복산님 블로그에 댓글을 달려고 하니 한글이 안되던군요.
      영어로 할까 하다 작복산님이 못알아 보실까봐 기냥~~ㅋㅋ

  3. 구름다리 2012.10.10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데,
    잘보고 갑니다.
    아무래도 근처 시장상인들도 자발적으로 바뀌어야 할것 같네요

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9월21일, 22일 양일간에 걸쳐 경남도민일보와 그 자회사인 사회적 기업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에서 주관하는 창동예술촌 블로거 팸투어에 가보았습니다.

 창동예술촌 조성사업이 쇠락해 가는 마산의 도심인 창동과 오동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예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하는 통합창원시의 야심찬 도심재생 프로젝터이고, 이날 블로그 팸투어도 이런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홍보전략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마산”이라는 도시는 얼핏 보기엔 지방의 한 작은 도시 같지만 알고 보면 독재정권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 계기를 만든 엄청나게 무게 있는 도시입니다.

 그 계기란 3.15 의거와  부마항쟁 사태입니다.

 


 3.15의거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의 데모였고,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 끔찍한 모습의 사진 한 장이 4.19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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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 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들이 시작한 데모가 부산지역 계엄령선포로 마산으로 옮겨와 처음에는 경남대생들이 주축이었으나 차츰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하는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그 심각성을 깨닫고 10월 20일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고, 며칠 후 10월26일 궁정동에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피살되고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맙니다

 

 나는 팸투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역사학자이고 ‘해딴에’의 멤버인 박영주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33년 전 내가 겪었던 사건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나는 79년 3월1일 공무원으로 초임 발령을 받아 당시 마산 월영동 경남대 옆에 있는 창원군청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8일 오후 갑자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만날재 고개로부터 경남대생들이 밀려내려 오고 전투경찰은 영생아파트 쪽에서 올라오며 투석전과 최루탄 전을 하며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데모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수선한 가운데 일과가 끝날 즈음 데모대가 시가지 쪽으로 옮겼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산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박영주씨-

 

 

 당시 내 나이도 대학생 그들과 같은 나이이므로 사태가 궁금키도 하여 창동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3.15탑 부근에서 차에서 내려 부림시장을 지나 창동쪽으로 가는데 모든 가게는 셔터를 내리고 간판 불마저 모두 소등을 하고 사람들이 없으므로 시가지는 마치 장이 서지 않는 날의 장터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창동사거리쯤에 이르자 데모대는 북마산 쪽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전투경찰은 남성동파출소 쪽에서 전투대열을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유리병을 던지며 진격하였고 빈 가게인줄로만 알았던 가게들 쪽문으로 빈병상자를 들고 나오는 학생과 시민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이 데모가 단순히 학생들의 데모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내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순간 맞은 곳을 짚어보니 인중 왼쪽 코 밑 자리에 손가락 하나가 푹 들어가는 상처가 생겼습니다.

 데모대가 던진 깨어진 유리병을 전투경찰이 주워 데모대를 향해 던졌는데 그 중 한 개가 내 얼굴에 박한 것입니다.
 피는 쏟아지고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수건을 건네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갔는데 병원 정문은 닫혀 있고 불도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쪽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고 의외로 병원의 의사와 간호원은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전에 학생들과 병원간에 교감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산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학문당 서점-

내가 유리병을 맞은 곳이 아마 이 근처로 짐작됩니다.

 
 간호사가 상처부위 피를 닦고 의사가 막 찢어진 부위를 집으려고 하는 즈음 나이 많은 할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싸매고 들어오는가 하면 온갖 중상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여 의사는 중상환자들을 돌보기에 바빠 간호사가 내 상처를 아홉 바늘 꿰매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뒷날은 얼굴이 퉁퉁 부어 출근하지 못하고 그 뒷날 출근을 하자 복무기강을 담당하는 내무과장이라는 분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공무원 신분으로 반정부 데모를 하는 현장에 왜 가느냐며 당장 시말서를 쓰 오라고 하였고 나는 시말서를 쓰다 받쳤습니다.


 시말서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유독 시말서를 많이 썼던 문제 공무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장발이라고 시말서, 장발을 시비하므로 빡빡머리를 하고 갔더니 빡빡머리라고 시말서, 빨간 골덴 바지 입었다고 시말서, 운동화 접어 신었다고 시말서... 등등
 오죽했으면 직원들이 “네는 차라리 시말서 등사해 놓고 날짜만 바꿔서 내라.”는 말까지 했을까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구속과 압박이 세상을 짓누르던 시절이 유신시절이었고, 이런 억눌림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민중의 욕구가 분출했던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되돌아보면 그 날 깨진 유리병에 본래 주름진 곳을 맞았기에  다행이지, 만일 눈이나 코에 맞았더라면 이 잘 생긴 얼굴(^v^)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 

 

 그날 나는 “이곳에서 부마항쟁의 흔적은 내 얼굴에 남아있는 이 아홉 바늘 상처 자국뿐이지 아무것도 없다”며 농을 하기도 했지만 정말 33년 전 그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진 창동사거리에는 그날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이라도 창원시에는 그날을 상기할 수 있는 조형물이나 사진 전시장을 이곳 창동사거리에 하나쯤 설치하면 어떨까요?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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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9.25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목줄 짤리지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세여.!
    ㅎㅎㅎ
    그래도 시말서나 쓰고 말았으니 망정이지...
    공무원신분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에는 전두환이 한데
    삼청교육대 끌려 갔을지도 모릅니다.

  2. 커피믹스 2012.09.25 1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의 산 증인이시네요. 크게 안 다친게 다행입니다..
    이번기회에 창원시는 3.15 관련 조형물을 만들거 같네요.

  3. 실비단안개 2012.09.25 2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말서 전문 투사였군요.
    창원군청이 왜 마산에 있었는지요?

    • 땡삐 선비(sunbee) 2012.09.26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남도청이 부산에 있었듯이...
      창원군은 본래 마산,진해,창원시가 모두 창원군었는데 이 도시들이 분가를 하고 진동.진북.진전, 구산,동읍,북면,대산면,내서면,웅동,천가면이 남다가 보니 그 중간지점이고 일제때 부터 청사가 있어서 그랬던것 아닐까요?

  4. 참교육 2012.09.26 0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상 대상자가 되기는 하셨는지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ㅎㅎㅎ

  5. 김천령 2012.09.26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말서 공무원이셨다니... 멋지십니다.
    그날 이야기를 오늘 자세히 듣게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6. Boramirang 2012.10.25 1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하신 경력이십니다. 시말서를 전문적(?)으로 쓰셨으니 말이죠.
    그나저나 선비님의 글을 읽다보니 부마항쟁 당시 모습이 절로 오버랩됩니다.
    안부 전해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

  7. 몇년전 거기살던사람. 2012.11.11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고향은 경기도 용인 이지만 .마산에 일로 우연히 정착해 산 2년여의시간들.
    마산이 잊혀지지 않는 제2의 고향같네요.
    그당시엔 마산이 그리도 싫더니만...
    억세도 드세고,그러나 계산없이 정직한 사람들.
    정치적이긴해도 뭔가 권위나 억압에 반항하는 생활태도등등...
    거기있을땐 잘몰랐는데 각지방마다 정서가 다른데,
    마산은 강하고 큰인물이 나올장소같아요.
    젤싫어하는곳도 마산 젤 그리운곳도마산,
    살고싶은곳도 마산이되었네요.

    저서점 몇번갔던기억이있는데,,,
    조금더 올라가면 떡볶이 파는 분식집들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