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6.17 허성무 창원시장 구슬은 서 말인데....
  2. 2019.03.05 창원에서 독립만세운동 원조는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아닐까?
  3. 2017.10.17 이제마, 함흥 주모의 발칙한 음모가 창원에 이르러...

 지난 68일 진해문화공간 흑백에서 진해근대문화비전과 이순신 스토리텔링 사업에 대한 시정공유를 위한 라이브 토크가 있었습니다. 배우 이재용과 진해문화원장 홍성철, 그리고 허성무 창원시장 세 사람이 진해 앞바다에서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 관한 이야기와 진해 중원로타리와 우체국 등 일제시대 이후의 근대문화유산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1시간 넘게 이야기 했습니다.

 진해문화원장이 진해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허성무 시장이 진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토록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참석한 이들 모두가 정말 의외라며 놀랐습니다.

진해 삼포라는 동네는 오지 중의 오지로 이곳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허성무 시장은 이곳의 길과 경치를 훤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 <삼포로 가는 길><황포 돛대>에 얽힌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허성무 시장은 진해가 가지고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유산들과 그 속의 이야기들을 엮어 관광자원화를 하며, 그에 더하여 높이 100미터 이상의 거대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설치하여 창원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파리 에펠탑이 그 도시를 대표하듯 이 말입니다. 허성무 시장의 진해에 관한 높은 식견과 상상력은 그 자체로 값진 구슬임에는 틀림없으나 문제는 그 구슬을 어떻게 꿰느냐에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지식과 현실에서의 정책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허성무 시장의 식견, 상상력과 창원시 공무원들의 거대 조직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기에 그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진은 장복산님 블로그에서-

이순신 장군과 진해만 해전

 나는 몇 해 전 지인의 권유로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약칭 이배사)’이라는 모임에 몇 번 참석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이고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었기에 주로 그쯤에서 전투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장 전투가 많았던 곳이 진해 앞바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막힌 일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한 지역의 지자체에서는 모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바탕으로 너도 나도 기념행사에다 기념관이다 뭐다하며 이순신 팔이를 하는데 정작 전투가 가장 많았던 창원에서는 그동안 깜깜했던 것입니다.

 이날 홍성철 진해문화원장이 15번의 전투 중 9번의 전투가 진해 앞바다에서 있었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이것이 맞네 틀리네하는 논란도 있습니다.

여기서 창원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해라고 알고 있는 오늘의 진해는 조선시대에는 웅천현이었으며, 지금의 삼진쪽이 진해현이고 진해현청이 ()진동면사무소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진동, 진북, 진전, 구산면 앞의 바다가 모두 진해 앞바다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인터넷에 진해만을 검색하면 그림과 같이 나옵니다. 웅천의 합포, 웅포, 안골포 해전에다 거제와 고성의 당항포, 옥포, 율포, 적진포, 장문포 해전을 더하여 9번이라 한 것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시비가 갈리긴 하지만 웅천의 전투만 가지고 하드라도 전투가 가장 많았던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웅천과 가덕도에는 조선의 성곽과 왜구의 성곽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어 이곳이 서로에게 있어서 군사적 요충지로써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된 것이 어디 지명뿐이겠습니까?

진해 군항제는 1952413일 북원 로터리에 우리나라 최초로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하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라도 진해하면 벚꽃축제가 연상될 만큼 진해는 벚꽃축제로 유명해지고 정작 이순신 장군 추모제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허성무 시장은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관광자원, 문화자원화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사진은 팬져님의 페북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의 랜드마크화 위해 . . .

 뉴욕의 자유여신상 높이가 92미터인데 100미터 높이라 하면 과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규모가 크고 보면 그 규모만으로도 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창원에서 이뤄져왔던 로봇랜드, 해양신도시, SM타운 등의 대형사업들을 보면 글쎄???’라는 의구심과 함께 자꾸만 머리가 갸우뚱해지기도 합니다.  하도 많은 지자체들이 이순신 팔이를 많이 하고 있어 몇 안 되는 인구의 대한민국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같은 소제를 가지고 후발주자로 나선 창원시가 과연 관광자원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허성무 시장의 열린 행정스타일 속에 분명 그 답이 있으리라 기대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분야에 종사하며 체득한 경험으로 제공하는 백성들의 각종 정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략의 요체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형을 익히고 기후와 물때를 면밀히 파악하여 이를 십분 활용함으로서 말도 안 되는 오합지졸의 군사로 왜적 정예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자신의 전공보다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는 애민정신입니다. 나는 허성무 시장이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창원시민과 이순신 장군의 충정을 받들어 이 사업을 추진해 준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해양관광산업 활성화와 동상의 위치는 육지가 아닌 바다의 관점에서. . .

 해양관광산업 활성화에 대해 주제넘게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육지의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의 전투와 해양관광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관점을 육지에서 바다로 눈을 한 번 돌려 봐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창원의 바다에서 이뤄져 왔던 사업들을 보면서 참으로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돝섬에 요트장을 설치 할 때 나는 하필이면 바람이 많이 치는 곳에 요트장을 설치하누?” 했는데 아니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 부서져 다시 시공을 하였고, 마산의 가포를 매립하는 것을 보고 마산은 우째 망하는 짓만 골라서 하누? 앞으로 귀산만 좋아지겠네.”했더니 지금에 와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무원들이나 용역회사 직원들이 무능하고 나빠서가 아니라, 바다를 경험하지 못해봤기에 지도 펴놓고 그림만 근사하게 그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창진이 통합되면서 창원시는 해양관광산업을 시정의 모토로 내세웠습니다만 계속 헛발질만 하고 있습니다. 창원의 바다를 경험하고 그 속의 매력이 어떤 것이며 바다를 즐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창원의 바다를 설계하고 디자인한다는 그 자체가 웃기는 일인 것이죠. 제발 책임면피용으로 용역회사에 용역만 줄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 바람 부는 날 등등의 바다체험도 해보고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발 들어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육지에 세워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표석만 구경하지 말고 배를 타고 해전의 길을 따라 직접 항해도 해보기 바랍니다. 하루 동안 옥포에서 전투를 치르고 합포에서 또 다른 적을 찾아 쳐부순 후 남포에서 밤을 지새웠다 하니 그 정도 항해를 하려면 노를 젓는 격군들의 노고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도 해보기 바랍니다.

 장군이 부산의 왜적 본거지를 치기 위해서는 길목에 있는 웅천의 적을 무찔러야 했듯이 앞지른 이순신 팔이지자체를 제치고 진해만을 이순신의 바다로 상징할 수 있는 길목이 어디인지를 육지와 바다에서 제대로 찾아주기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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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의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손혜원 의원의 땅투기 의혹으로 시끄럽긴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일제 강점기 유산도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추세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원과 마산에서만큼 역사문화유산이 흔적 없이 사라진 도시도 드물지 싶습니다.

 그 이유는 마산과 창원이라는 도시가 지리적 여건상 수출입과 공업화에 유리한 위치에 있어 전라도나 충청도의 도시들에 비하여 산업화,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개발에만 몰두한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창원의 경우 전국 5도호부 중 한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창원향교를 제외하면 역사적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같이 흔적 없이 사라진 창원의 역사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재조명하고자 하는 블로거 조현근씨는(블로그-팬져의 국방여행) 근래 대단히 유의미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창원 북동동시장 일대에서 창원읍성의 흔적을 찾았고, 둘째는 창원 동정동의 일제신사를 찾았고, 셋째는 1943년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한 유일한 생존자 오경팔옹을 찾은 것입니다.


창원읍성 복원과정에서 나온 선정비들

동정동에 있었던 일본신사의 모습

-사진은 조현근의 블로그에서-


창원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생존자 오경팔옹을 찾은 조현근.

 나는 오경팔옹을 인터뷰하러 간다는 조현근씨의 전화를 받고 ‘오경팔?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하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30여 년 전 내가 창원시 공무원으로 재직할 무렵 창곡동에서 무허가건물 단속과 관련하여 사건이 기억났습니다. 과거 거주지와 도의원에 출마했던 경력으로 비추어 틀림없이 동일 인물이었지만 나의 기억에 비추어보아 그 오경팔씨가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조현근씨의 걸음이 별 소득 없는 헛걸음이 될 것으로 짐작하였습니다만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오경팔옹은 조현근씨의 인터뷰로 인해 창원시장으루터 감사패를 받기도 하고 많은 언론에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현근씨가 오경팔옹을 찾아 최초 인터뷰를 하고 세상에 알린 당사자라는 점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창원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오경팔옹

-사진은 경남매일기사에서-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삼진, 웅천 4.3만세운동의 원조로 짐작하는 근거는? 

 창원시는 지금까지 마산지역의 삼진과 진해지역 웅천의 4.3만세운동에 대한 기념행사는 해왔지만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에 오르내리는 이가 없었습니다.

 삼진의거는 전국 4대 의거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인데 창원대도호부 청사와 함께 인구가 가장 많았던 창원읍의 읍민만세운동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원읍민 만세운동은 3월23일과 4월2일 두 차례 있었고 한번에 6,000~7,000명의 인원이 참여했다고 하니, 날짜로도 삼진과 웅천의 4월3일보다 빠르고 숫자 면으로도 삼진의 5,000명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만고 내 생각이긴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시대에 따라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창원대도호부의 역사는 1601년(선조34년)에 시작하여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다음해인 1895년(고종32년)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리고 1907년 창원대도호부 청사는 현재의 창원초등학교 전신인 창흥학교 교사로 사용됩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조선말기 창원읍에는 관료출신이나 교육을 받은 이가 많았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에 대한 접근도 빨랐을 것입니다. 

 3.1독립만세운동의 역사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만세운동의 시작점이 시장인데 비해 창원읍민만세운동의 발원지는 위의 창흥학교에서 시작하여 시장으로 옮겨갔습니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보자면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삼진과 웅천의 만세운동에 도화선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즉 삼진과 웅천의 만세운동 원조가 창원읍민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삼진 만세운동비


웅천 만세운동비

 


  창원 만세운동비



창원대도호부, 그리고 창원읍민만세운동과 창원읍 역사를 재조명

 정황이 전술한 바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창원읍민만세운동이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유로 나는 급격한 도시변천과정에 창원읍이 겪은 특별한 사연에서 짚어 봅니다.

 창원대도호부에서 창원군, 마산시, 진해시가 분리되는 가운데 창원읍 지역은 1973년 7월 1일까지 창원군 창원면이 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부터 마산시 의창동이 되었고, 1976년 9월 1일 경상남도 창원출장소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다 1980년 4월 1일 창원출장소가 창원시로 승격되면서 창원시 의창동이 되었습니다.

 즉, 구한말에서부터 창원읍은 창원군-마산시-경상남도 창원출장소-창원시로 소속이 바뀌다보니 창원읍민만세운동이나 창원읍성의 역사를 담아내는 정부기관이 제대로 없었습니다.

 이제 3개시가 통합되어 옛 창원대도호부를 다시 이룬 만큼 비록 늦었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금이라도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다시 더듬어보고 우리가 무심코 간과했던 창원읍성에 대한 역사의 흔적들도 되살리고 보전하는 방법들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1920년대와 현재의 창원초등학교 모습

위 아래의사진의 둥근 표시 부분이 동일한 곳으로 추정


아이들이 공을 두고 있는 자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곳으로 추정



처음으로 개최되는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많은 참여를. . 

 여러 의미에서 올해 처음으로 개최되는 3.23창원읍민만세운동 재현행사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됩니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창원읍민만세운동은 2012년 창원시의원 이었던 김동수 의원이 시의회에서 자유발언을 통해 한번 거론되긴 하였지만 기념행사 같은 것은 없었기에 시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져왔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현근씨가 창원시청과 의창구청, 창원시의회 등을 백방으로 쫓아다닌 끝에 겨우 100주년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창원읍민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으로는 두산백과사전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지만 별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읍민만세운동의 발원지인 현재의 창원초등학교 역사 전시관에 가서 당시의 학교모습과 학생들의 사진 등을 함께 보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 글을 보는 분은 누구라도 관심을 가지고 3월 23일 개최되는 이 행사에 꼭 참석해서 창원초등학교의 전시관도 보고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재현행사에도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이버 두산백과에 나오는 내용

창원읍민 만인운동비

 昌原邑民萬人運動碑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갈 때 배중세(裵重世)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설관수(薛灌洙)는 읍내 청년회관에서 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윤호(曺潤鎬)·신갑선(申甲善)·조희순(曺喜舜)·송석민(宋錫敏)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1919년 3월 23일 창원읍내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3일 오후 2시 20분경, 공도수·송석민 등이 창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원초등학교) 대수정(大樹亭)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사의 취지를 설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6000~7000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가 고조되자 일제 군경이 총검을 앞세워 탄압하여 오후 5시 20분경 군중이 흩어지고 3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날 검거를 피한 몇몇 주동자들은 4월 2일 장날에 다시 만세 의거를 일으켜 6000~7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1차에 비하여 더욱 강력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일제는 마산에서 급파된 지원 병력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20여 명을 검거하고 시위 군중을 겨우 해산시켰다.


창원읍의 만세 시위에서 주동자로 검거된 설관수와 공도수·구재균·김호원·조윤호·조희순·신갑선·사치홍(史致弘)·박화열(朴和烈) 등은 징역 6월 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공재천孔在千)·김창실(金昌實) 등은 태형 90대의 형벌을 당하였다. 후에 이들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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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 513 | 창원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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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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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14일 주로 국방과 성곽에 관한 내용으로 지역에서 블로거 활동을 하는 팬저 조현근이 제안해서 구 진동면사무소(옛 진해현 관아)에서 열린 동무 이제마의 진해 현감 부임 130주년 기념행사엘 가보았습니다.

 조현근은 이제마가 진해현 현감을 지내면서 한국 의학계의 독창적 의서인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이것이 지역의 큰 문화적 자산임에 착안하여 창원시당국에 문화 콘텐츠사업을 제안하였으나 무관심하므로 민간 차원에서라도 시작해보자하여 개최한 행사였습니다.



-사진들은 펜저님의 꺼 빌렸습니다.-


 사실 나는 행사장에 참석한 그 순간까지도 체질이 태양인이니 소음인이니 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어도 ‘이제마’라는 인물도 ‘사상의학’이라는 의학에 대해서도 잘 몰랐는데 이날 박상표 마산검역소 소장이 “우리민족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가 한글이며 다른 하나가 사상의학이다”라고 하는 말에 인터넷을 검색해보고서야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마는 무예를 좋아해 장차 훌륭한 장수가 되겠다는 각오로, 스스로 '동쪽나라의 무인'이라는 뜻으로 '동무(東武)'라 호를 지었는데 그의 탄생일화가 재미있습니다..

 

『아버지인 이 진사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주막에 묵었다. 이 주막에는 늙은 주모가 과년한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인물이 박색일 뿐만 아니라 사람됨이 변변치 않아 시집보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주모는 이 진사가 술에 취해 묵고 있던 방에 딸을 들여보내 하루를 묵게 했다.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할아버지 충원공의 꿈에 어떤 사람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필을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귀댁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주시오"라고 한 뒤, 기둥에 매 놓고 가버렸다. 충원공은 꿈이 하도 신기해 일어나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밖에서 누가 급히 하인을 불렀다. 하인이 나가보니 어떤 여인이 강보에 갓난아기를 싸안고 들어왔다. 충원공은 조금 전에 꾼 현몽이 떠올라 그 모자를 받아들이고 아이의 이름을 제주도 말을 얻었다 해서 '제마(濟馬)'라고 지었다.』



 이제마는 함경도 함주군(지금의 함흥) 진사 이반오의 장자이긴 하지만 주모 딸인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서자로 밖에 행세할 수 없었습니다.

 서자라는 신분적 장벽 때문에 그는 문반이 아닌 무반으로 입신하려 했고 실제로  1896년 강원도 최문환의 모반을 진압하여 함경남도 고원군수(종4품)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무인인 그가 의학을 연구하게 된 이유는 그는 식도 협착증ㆍ구토증과 손발이 마비되는 신경염 등 고질병이 많았는데, 여러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도 효험이 없자 스스로 의학을 연구하여 치유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세종대왕의 한글 다음으로 독창적인 학문이었다고 하는 ‘사상의학’이란 어떤 것 인가를 인터넷에서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ㆍ중국ㆍ일본에서 발달한 동양의학은 인체와 자연의 기(氣)를 중시하는 의술이다. ‘음양오행’이라는 단어에 집약되었듯이, 그 기는 일단 음양으로 크게 나뉘고 다시 오행(목ㆍ화ㆍ토ㆍ금ㆍ수)으로 세분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이제마 이전까지 동양의학은 인체의 주요 구성을 ‘오장육부(五臟六腑)’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사상의학’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이제마는 오행이 아니라 사상(四象)이라는 새로운 체계에 입각해 의학을 구축했다. 그는 인체를 ‘사장사부(四臟四腑)’로 파악하면서 그동안 환자의 병증에만 치중한 치료에서 벗어나 환자의 체질을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새로운 의학을 주창했다.   즉 그는 수많은 개별적 증상보다 환자의 체질이 더욱 중요하므로 증상이 같더라도 체질이 다르면 다른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모든 병은 심화(心火)를 끓이는 데서 생긴다”면서 감정의 동요를 가장 중요한 병인(病因)으로 지적했다. 그는 “옛날 의사들은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 등이 치우쳐 병이 되는 것은 모르고, 음식 때문에 비위(脾胃)가 손상되거나 추위ㆍ더위ㆍ습기의 침범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으로만 알았다. 일을 할 때 적절하게 응변(應變)해 지나치게 심화(心火)를 태우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제마가 보기에 심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주(酒)ㆍ색(色)ㆍ재(財)ㆍ권(權)’이었다. 그는 “이 네 가지는 옛부터 경계해온 것으로 사람의 수명이 여기에 달려있다”면서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면 반드시 사치와 여색을 탐하고, 게으르면 반드시 술과 식탐을 내며, 속이 좁고 급하면 반드시 권세와 총애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탐욕스러우면 반드시 돈과 재물에 욕심을 낸다”고 지적했다([동의수세보원]』




 이 내용을 보자면 사람의 체질과 기질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이것은 인력으로 다스릴 수 없는 DNA이기 때문에 병적 증상을 가지고 다스릴 수 없으며, 이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심화 즉 스트레스의 요인을 가지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체형을 보고 체질을 알 수 있고, 체질을 알면 그 사람의 성품까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신통방통한 의술입니까?

 요즘 말하는 유전적 DNA 질병과 스트레스성 질병 치유법을 총망라하였으니 참으로 획기적인 의술이라 할 것입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창원시장후보로 뛰고 있는 전수식 마산 전부시장도 참석했는데 그는 “산청에서 실상도 없는 허준과 유의태의 이야기를 가지고 한방의 본거지가 산청인 것처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야단법석을 하는데 분명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이제마라는 주제를 놓고도 이제까지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앞으로 이제마를 스토리텔링하여 노령화 시대의 노인복지와 한방의료를 접목하여 삼진이 한방의학의 메카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는 그 외도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진해현 동헌과 성곽 그리고 애민비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특히 곰솔조경 박정기 대표의 노거수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쪽의 함흥 주막집 주모의 발칙한 음모가 머나먼 남도 창원에 이르러 꽃을 피우다니....

 창원시장 후보 전수식은 그 주모와 과연 인연이 닿을 수 있을까??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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