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9.06.19 허성무 시장의 진해 스토리텔링과 이순신 장군 해전에 대해
  2. 2019.06.17 허성무 창원시장 구슬은 서 말인데....
  3. 2014.10.06 임진왜란 일본 패인은 이순신보다 곽재우다. (5)
  4. 2012.10.30 돝섬의 8억짜리 보물을 찾아. (7)

  지난 68일 진해문화공간 흑백에서의 진해근대문화비전과 이순신 스토리텔링 사업에 대한 시정공유를 위한 라이브 토크쇼 2부 이야기입니다.

 허성무 창원시장이 이런 행사를 마련한 이유는 진해가 지닌 진면목을 제대로 알고 이를 근거로 진해를 문화도시, 관광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구상을 밝힘과 동시 시민들의 뜻을 듣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솔직히 말해 외국여행을 하다보면 우리나라만큼 지역 고유의 역사유물이 없는 도시들도 찾기 어렵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놈들이 고의적으로 우리의 역사흔적을 지우려 했고, 6.25 동란 때에는 무차별 포화로 문화재들이 소실되고,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발전 과정에는 무조건 하고 서구화가 좋은 줄 알고 따라가기에 바빴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러다보니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고만고만한 볼거리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나는 몇 해 전 경남도민일보의 해딴에가 진행하는 역사문화탐방에 따라다니면서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무엇이든지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알지 못하면 고인돌은 그냥 돌무더기이고, 고건물들은 낡고 오래된 건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었던 역사를 알고 나면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순장군 하면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은 떠올리면서도 정작 이순신 장군이 가장 전투를 많이 치른 진해 앞바다에서의 해전에 대해서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지금의 진해인 웅천 앞바다에서는 합포해전, 두 번의 안골포 해전, 웅포해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유독 웅천에서 왜 전투가 많았을까요?

 

 

 

대마도와 부산, 그리고 진해 앞바다

 지도를 놓고 보면 대마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보다 훨씬 가까운 섬으로 대마도와 일본 본토의 거리보다 부산까지의 거리가 더 가깝습니다. 지금도 일본 본토에서 요트나 소형 보트를 타고 한국에 오려면 반드시 대마도에서 1박을 하고 대한해협을 건넙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쟁상황을 보면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면서 곡창지대인 호남을 장악하지 못하여 식량보급에 애를 먹었습니다. 부산에서 전라도로 가려면 거제도 남쪽 외해로는 파고가 높아 거제와 통영 사이의 견내량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진해만에서 이 길목을 차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정유재란 때 일본은 조선의 조정을 이간질하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칠천량에서 조선군함 160척 중 12척만 남기고 전멸시키는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로서 왜군은 호남과 충청도의 곡창지대를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이 전쟁에서 목숨줄과 같은 견내량을 사수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진해만에서 치른 해전의 역사를 알고 보면 누구라도 진해바다를 새롭게 보게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중에서 웅천바다에서 있었던 전투만을 대략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금은 선박들이 대형화 되어 일본 직항로가 있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대마도를 거칠 수 밖에 . . . 

 

합포해전

 159257일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왜군을 쫓다가 치른 전투로 옥포해전의 연장선에 있는 전투라 할 것입니다.

 네 시간여에 걸쳐 첫 전투 옥포해전을 치르고 거제북쪽 영등포에 정박하여 지친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중 적선 5척이 거제 앞바다를 지나 웅천 쪽으로 가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습니다.

 5척의 적선을 치기위해 장군은 휴식하고 있는 전군에 출동을 명령 5척의 일본 전함을 모두 불사르고 1,000여명의 일본 수군이 육지로 도망쳤습니다.

 

안골포해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치른 해전과 정유재란 때 원균이 치른 해전 둘이 있습니다.

 먼저 이순신 장군의 안골포 해전은 159278일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전선 73척 중 47척을 분멸시키고 12척을 온전하게 나포하고 도망간 14척의 적선을 추격하여 79일에 가덕으로 향하는데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대어 있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듣고 1592710일 출전하여 적선 42척 중 20척을 분멸시킨 전투였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거리가 있습니다.

 안골포는 만이 깊고 폭이 좁아 공격하기도 사납지만 적이 도망치기도 어려운 지형입니다. 굳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머지도 모두 분멸시킬 수는 있었으나 왜군이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두었으며, 예상대로 왜적은 밤을 타 소선을 타고 부산방면으로 도주를 합니다.

 합포해전에서도 그러했듯이 수군이 군함을 잃으면 육지로 가서 노략질을 하므로 죄 없는 백성들이 고초를 당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공을 앞세워 조정에 잘 보이려는 아첨꾼들처럼 무작정 전공실적만 올리기 보다는 백성의 안위를 먼저 염려하고 보살폈다는 점입니다.

 

 2차 안골포해전은 정유년에 일본군 50만 명이 부산을 침략할 것이라는 첩보를 들은 조정에서 원균에게 부산의 일본해군 본거지를 치라는 명을 내립니다.

 하지만 웅천과 가덕도 일대에 일본 해군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이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서는 부산을 향할 수가 없었기에 원균은 1597618일에 한산도를 출발 619일 안골포로 진격하였습니다. 이날 조선군은 1명의 사상자만 나고 왜선 2척을 노획하는 승리를 하고 철수를 합니다.

 원균의 승리는 거기까지였습니다.

 1597715일 조정의 등살에 못 이겨 출정한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도 괴멸되고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맙니다. 그 결과 일본수군은 전라도까지 진출하여 곡창지대를 차지하였고, 이를 때려잡는 전투가 그 유명한 명량해전이었던 것이죠.

 

웅포해전

 이 전투는 본래 조선과 명나라의 육군이 왜군을 부산으로 몰아가고 해군이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던 길에 그 길목인 웅천에 있는 왜군을 제거하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육군과 합동으로 부산을 치라는 명령을 받고 159326일 이순신 장군은 89척의 연합함대에 14000명을 거느리고 여수를 출발 부산으로 진격합니다.

 작년 안골포와 부산해전을 위해 이 바다를 지나갔는데 웅천은 왜성을 쌓을 만큼 차츰 요새화되었습니다.

 일본은 100여척의 전선을 그대로 포구에 묶어둔 채 육지에서만 응전하려고 했습니다.

 210일 이순신 함대는 웅천으로 쳐들어갔지만 적은 야산 진지에서 포격을 하므로 적선에 제대로 총통을 쏠 수도 없고, 조선함대의 포구로의 진입을 막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 목책을 설치해 두었기에 퇴각하여 가까운 포구에서 군사들을 쉬게 했습니다.

 등 뒤에 적을 두고 부산으로 진격할 수는 없는 법, 210, 12, 18, 20일 연이어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 이순신은 철저히 상륙전을 회피했고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일본군사들과의 접전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이순신은 222일 결단을 내리고 상륙을 명령합니다.

 600여명의 승병과 1100명의 의병이 상륙하기로 한 작전이었습니다.

 왜군은 바다쪽만 신경 쓰며 모든 포와 조총을 그쪽으로만 집중하다가 측면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적의 의표를 찌른 기습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어렵게 치른 성공적인 전투였지만 명나라 육군과 합동으로 부산을 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 여수로 귀환했습니다.

 명나라가 일본과 50일 간의휴전 협상을 체결해버렸던 것입니다.

 

 앞의 합포해전에서 옥포와 합포간에 거리가 있음에도 하루만에 전투가 끝났습니다.

 지금까지의 해전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습니다만 유독 이 웅포해전은 15932210, 12, 18, 20, 22, 28일 그리고 346일의 7회에 걸쳐 치른 최장기간 전투이며 아군의 피해도 많았던 전투였습니다.

 비록 해군이 상륙작전까지 수행하여 승리한 전투라고는 하지만 전례 없이 아군의 피해가 많이 발생하기도 하고 긴 전투를 치렀습니다.

 육지에서의 한 달 전투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실 물, 씻을 물도 없이 파도에 출렁대는 배 위에서 한 달여의 전투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상황을 일기로 남겼지만 이 웅포해전에 대해서만은 일기로 남기지 않았음은 아마도 병사들의 죽음과 고통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빨간색으로 표시된 것이 기동로이고 웅포해전을 치루고 대부분의 유박은 거제 송진포입니다. 나머지는 송도에서 사화랑으로 사화랑에서 제포를 가는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위 자료는 팬져님의 블로그에서-

 

이순신의 스토리텔링과 관광자원화를 위한 잔소리. . .

 앞의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는 진해 앞바다에서의 전투를 가지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금의 진해 앞바다만 가지고 논할 것이냐 과거의 진해와 지도상에 나타난 진해만을 가지고 논할 것이냐는 제쳐두고 이순신 장군의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해양관광사업을 구상하려면 적어도 하루 동안 항해가 가능한 한산도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창원시의 사업이 창원보다 고성, 거제, 통영에 더 큰 기여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조금이라도 더 계승하고 확장하려면 소지역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확장된 그림을 그려주길 바랍니다.

 해서 세계 해전사에서 신화와 같은 존재인 성웅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이 땅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가슴에는 물론이요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시킬 수 있는 프로젝터로 진행해 주었으면 합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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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8일 진해문화공간 흑백에서 진해근대문화비전과 이순신 스토리텔링 사업에 대한 시정공유를 위한 라이브 토크가 있었습니다. 배우 이재용과 진해문화원장 홍성철, 그리고 허성무 창원시장 세 사람이 진해 앞바다에서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 관한 이야기와 진해 중원로타리와 우체국 등 일제시대 이후의 근대문화유산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1시간 넘게 이야기 했습니다.

 진해문화원장이 진해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허성무 시장이 진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그토록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참석한 이들 모두가 정말 의외라며 놀랐습니다.

진해 삼포라는 동네는 오지 중의 오지로 이곳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허성무 시장은 이곳의 길과 경치를 훤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 <삼포로 가는 길><황포 돛대>에 얽힌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허성무 시장은 진해가 가지고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유산들과 그 속의 이야기들을 엮어 관광자원화를 하며, 그에 더하여 높이 100미터 이상의 거대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설치하여 창원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파리 에펠탑이 그 도시를 대표하듯 이 말입니다. 허성무 시장의 진해에 관한 높은 식견과 상상력은 그 자체로 값진 구슬임에는 틀림없으나 문제는 그 구슬을 어떻게 꿰느냐에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지식과 현실에서의 정책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허성무 시장의 식견, 상상력과 창원시 공무원들의 거대 조직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기에 그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진은 장복산님 블로그에서-

이순신 장군과 진해만 해전

 나는 몇 해 전 지인의 권유로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약칭 이배사)’이라는 모임에 몇 번 참석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이고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었기에 주로 그쯤에서 전투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장 전투가 많았던 곳이 진해 앞바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막힌 일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한 지역의 지자체에서는 모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바탕으로 너도 나도 기념행사에다 기념관이다 뭐다하며 이순신 팔이를 하는데 정작 전투가 가장 많았던 창원에서는 그동안 깜깜했던 것입니다.

 이날 홍성철 진해문화원장이 15번의 전투 중 9번의 전투가 진해 앞바다에서 있었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이것이 맞네 틀리네하는 논란도 있습니다.

여기서 창원시민들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해라고 알고 있는 오늘의 진해는 조선시대에는 웅천현이었으며, 지금의 삼진쪽이 진해현이고 진해현청이 ()진동면사무소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진동, 진북, 진전, 구산면 앞의 바다가 모두 진해 앞바다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인터넷에 진해만을 검색하면 그림과 같이 나옵니다. 웅천의 합포, 웅포, 안골포 해전에다 거제와 고성의 당항포, 옥포, 율포, 적진포, 장문포 해전을 더하여 9번이라 한 것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시비가 갈리긴 하지만 웅천의 전투만 가지고 하드라도 전투가 가장 많았던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웅천과 가덕도에는 조선의 성곽과 왜구의 성곽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어 이곳이 서로에게 있어서 군사적 요충지로써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된 것이 어디 지명뿐이겠습니까?

진해 군항제는 1952413일 북원 로터리에 우리나라 최초로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을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하게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아무라도 진해하면 벚꽃축제가 연상될 만큼 진해는 벚꽃축제로 유명해지고 정작 이순신 장군 추모제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허성무 시장은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관광자원, 문화자원화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사진은 팬져님의 페북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의 랜드마크화 위해 . . .

 뉴욕의 자유여신상 높이가 92미터인데 100미터 높이라 하면 과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규모가 크고 보면 그 규모만으로도 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창원에서 이뤄져왔던 로봇랜드, 해양신도시, SM타운 등의 대형사업들을 보면 글쎄???’라는 의구심과 함께 자꾸만 머리가 갸우뚱해지기도 합니다.  하도 많은 지자체들이 이순신 팔이를 많이 하고 있어 몇 안 되는 인구의 대한민국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같은 소제를 가지고 후발주자로 나선 창원시가 과연 관광자원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허성무 시장의 열린 행정스타일 속에 분명 그 답이 있으리라 기대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분야에 종사하며 체득한 경험으로 제공하는 백성들의 각종 정보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략의 요체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형을 익히고 기후와 물때를 면밀히 파악하여 이를 십분 활용함으로서 말도 안 되는 오합지졸의 군사로 왜적 정예군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자신의 전공보다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는 애민정신입니다. 나는 허성무 시장이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창원시민과 이순신 장군의 충정을 받들어 이 사업을 추진해 준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봅니다.

 

해양관광산업 활성화와 동상의 위치는 육지가 아닌 바다의 관점에서. . .

 해양관광산업 활성화에 대해 주제넘게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육지의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생각하는 이순신 장군의 전투와 해양관광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관점을 육지에서 바다로 눈을 한 번 돌려 봐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창원의 바다에서 이뤄져 왔던 사업들을 보면서 참으로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돝섬에 요트장을 설치 할 때 나는 하필이면 바람이 많이 치는 곳에 요트장을 설치하누?” 했는데 아니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 부서져 다시 시공을 하였고, 마산의 가포를 매립하는 것을 보고 마산은 우째 망하는 짓만 골라서 하누? 앞으로 귀산만 좋아지겠네.”했더니 지금에 와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무원들이나 용역회사 직원들이 무능하고 나빠서가 아니라, 바다를 경험하지 못해봤기에 지도 펴놓고 그림만 근사하게 그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창진이 통합되면서 창원시는 해양관광산업을 시정의 모토로 내세웠습니다만 계속 헛발질만 하고 있습니다. 창원의 바다를 경험하고 그 속의 매력이 어떤 것이며 바다를 즐기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창원의 바다를 설계하고 디자인한다는 그 자체가 웃기는 일인 것이죠. 제발 책임면피용으로 용역회사에 용역만 줄 것이 아니라 공무원들이 직접 나서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낮과 밤, 바람 부는 날 등등의 바다체험도 해보고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제발 들어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육지에 세워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표석만 구경하지 말고 배를 타고 해전의 길을 따라 직접 항해도 해보기 바랍니다. 하루 동안 옥포에서 전투를 치르고 합포에서 또 다른 적을 찾아 쳐부순 후 남포에서 밤을 지새웠다 하니 그 정도 항해를 하려면 노를 젓는 격군들의 노고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도 해보기 바랍니다.

 장군이 부산의 왜적 본거지를 치기 위해서는 길목에 있는 웅천의 적을 무찔러야 했듯이 앞지른 이순신 팔이지자체를 제치고 진해만을 이순신의 바다로 상징할 수 있는 길목이 어디인지를 육지와 바다에서 제대로 찾아주기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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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컨텐츠진흥원,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경남 이야기’의 블로거 탐방대 두 번째 스케줄로 9월30일 홍의장군 곽재우가 임진왜란에서 육상전투에서 최초 승리를 거둔 의령의 기강과 정암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이 아니라 곽재우 장군의 민병이었다는 사실이고,
 둘째, 만우당 곽재우 장군하면 지금까지 무인인줄 알았는데 그는 시를 쓸 정도의 문인이고 선비였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영화 “명량”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열기가 전국을 달구고 있습니다. 나도 2년 전부터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을 약칭하여 ‘이배사’라는 모임에 참여하여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그래서 이순신 장군을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유일신쯤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여행 가이드를 해준 의령군청의 윤재환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일본이 전쟁에 패한 가장 큰 요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곽재우는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지만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하고 농업경영을 하고 살았습니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기록한 만큼 그는 구두쇠 소리를 들을 만치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며 재산을 모았는데 아마도 머지않은 장래에 큰 위난이 올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데 비해 그는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이 군량미를 얻기 위하여 전라도 곡창지대로 향하던 길목인 기강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때 그가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은 재산을 의병들의 가솔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때 백성들은 “난리 통에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매한가지니 처자식이나 배불리 먹고 살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의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10여명에 불과하였는데 5월 4일 기강 전투에서 첫 승리를 하고보니 이래저래 모여들기 시작하여 의병이 2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전란동안 그 많은 장졸들을 먹이고 입히자니 자신의 재산은 말할 것도 없이 친가, 외가, 처가의 재산까지 거들 냈으니 그의 친척들은 그를 마뜩찮게 여길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암튼 이렇게 하여 군량미를 얻기 위해 전라도로 향하던 왜군은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해군이 길목을 막고, 육지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곽재우 장군의 민병에 의해 길목이 막히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가 전쟁의 패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을 꼽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의 해군은 그나마 군대라 치더라도 육지에서는 관군은 썩은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일시에 조선천지를 소탕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정부조직에도 없는 민병이라는 것이 나타나 발목이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도 발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히면 걸음을 절룩거리듯이 파죽지세로 치고 나가던 10만의 왜군이 곽재우의 민병에 의해 발걸음이 무겁게 된 것입니다.

 더욱 재미있는 있는 것은 도요토미로서는 정부조직에도 없는 민병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곽재우 장군이 휘두르는 게릴라전술은 어느 병법이나 전술에도 없는 신출귀몰한 전술을 구사하므로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도요토미가 인정한 조선의 으뜸 장수이건만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재산과 인척들의 재산까지 나라에 바쳐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 썩고 부패한 조정의 관료들에 의해 그 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기에 지금까지도 제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연속극 등이 숱하게 있었지만 곽재우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나 연속극은 보지 못했습니다.
 바다에 성웅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 성웅 곽재우 장군이 있었음을 상기하는 영화 또는 연속극들이 만들어져 곽재우 장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루지기를 기원해 봅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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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9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곽재우 2014.11.22 17: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합니다. 잘 알아보니 정말 영화 3부작 만들고도 남을만큼 전략적이고 영웅적이더군요. 왜 영화화 안 되었는지 희한할정도

  3. 백두한라 2016.04.28 0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우당입니다. 곽재우 장군 훌륭하지요. 정기룡 장군이라고 아시나요? 육지의 이순신...권율, 원호, 신각, 사명당, 고경명, 김시민, 정뮨부, 김덕령 등등등...다모아야 이순신 공적과 유사할까 싶은데.

  4. 맞는말이긴한데 2016.09.10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전의 원인 1순위로 곽재우장군을 언급했다고하셨는데 실제로 임진왜란끝나고 100년뒤에 일본에 징비록이 퍼지기전까진 일본사람들은 이순신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기록에 남겨져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23전 23패의 치욕적인 기록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거라고 추측해봅니다.

  5. 짱구 2020.04.29 23: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순신은 나라의 충무공이라 불렀지만 곽재우는육군의병이었기 때문에 알아주는이가 없었다 곽재우는 전쟁에서 죽은게아니기 때문이다

 돝섬의 8억짜리 보물을 찾아.

 

 

 10월 28일에는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회원들과 함께 요트를 타고 이순신장군의 조선수군 항로 체험답사에 나섰습니다.
 이날 아침  8시 20분에 혼자 귀산을 출발하여 진해 요트학교 계류장을 향했는데 10시 약속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이 곳까지는 동력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다행히 정확히 제 시간에 도착하여 회원7명을 태우고 진해만을 벗어나자마자 엔진을 끄고 세일(돛)만으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이날은 바람도 좋고 날씨도 쾌청하여 세일항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날의 답사 코스는 조선수군이 제1차로 출전하여 두 번째 해전을 치룬 합포해전지(지금의 진해 학포)로부터 그날 밤 야영을 하였다는 남포 앞바다까지였습니다.
 당시의 기록인 이순신의 『임진장초』 「제1차 옥포승첩을 아뢰는 계본」에는 이렇게 그날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웅천땅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는지라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쳐서) 왜선들을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다음에는 적진포해전지를 갈 예정입니다. 적진포가 지금의 어디쯤이었는지를 두고 학자들 간에 이견들이 있는데 남포에서 야영을 하고 새벽에 출발하여 전투를 치르고 아침밥을 먹었다고 하니 당시 3~5노트의 전함 속도 정도로 되짚어가면 그 위치가 가늠이 되리라 봅니다.

 

 아무튼 이날 우리는 남포 앞바다에 이르자 바람이 잦아들면서 바다가 잠잠하므로 미리 준비한 진해의 말이김밥, 충무김밥, 생선회로 선상에서 성대한 오찬을 하고 귀산을 향했습니다.
 이 때도 풍향과 풍속이 세일항해를 하기에 아주 좋은 상태였기에 엔진을 끄고 항해를 하였음에도 너무 빨리 귀산 앞바다에 이르러 시간이 어중간하여 조각비엔날레가 열리는 돝섬을 가보자고 하였습니다.
  

 

 

-진해 요트학교 계류장에서 기념촬영

 

 

 

-오늘의 항해코스와 조선수군 그날의 의미를 새겨 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바람이 불자 요트는 기울고,    처음에는 쫄다가 차츰 익숙해져 제법 여유를 부려 봅니당~

 

 

 

 


 나는 평소 돝섬의 개발과 조각예술에 관한 관심에 많았던지라 2011년 4월에 내 블로그에 돝섬을 조각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제안을 한 바도 있고 하여 진작에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피일차일 하다가  비로소 이날에야 가게 되었습니다.

2011년 4월에 내 블로그에 올린 글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중략)
 돝섬을 조각공원을 겸한 스튜디오 공간으로 조성하였으면 한다.
 
 조각은 쇠를 깎고 돌을 다듬는 작업이 많아 그라인더소리와 해머소리가 시끄러워 도심에서 작품활동을 하기 곤란한 예술장르이다. 그래서 이곳을 조각가들의 예술활동 공간으로 제공하여 그들이 마음 편히 창작활동과 작품전시를 하도록 하며, 또한 그들의 상상력으로 기존 시설물들을 리모델링하여 시설물 자체부터 예술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탐방객에게는 조각예술의 감상과 체험활동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돝섬을 볼거리, 즐길 거리가 있는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하여 예술가와 돝섬이 상생하는 방도를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조각예술을 권하는 데에는 전술한 소음문제외도 창원시가 지니고 있는 인적, 산업적 인프라가 조각예술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인적 인프라 측면을 보자.
 우리는 창원의 조각가하면 문신 작가만을 생각하는데 대한민국 조각 1세대의 대표인 김종영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추상조각을 개척한 선구자요, 2세대로는 문신, 3세대로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조각한 작가 김영원을 비롯한 박석원, 박종배 등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들이 창원출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문하생들이 대한민국 조각예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음으로 산업적 인프라를 보자.
 현대 조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소재가 금속재이고, 창원은 기계산업의 메카로 금속재의 제조기술이 가장 발달한 도시이다.
 예전에는 조각가들이 모형과 본 작품을 조각가 스스로가 다 만들었지만 오늘날에는 디자인과 모형까지만 만들고 본 작품은 금속제조업체에 의뢰한다.   그러므로 금속제조 기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만들 수도 없다.
 
 나아가 앞으로의 조각예술 사조가 움직이는 조각, 즉 키네틱아트 쪽이 대세일 것임을 감안한다면 창원의 기계산업과 조각예술의 궁합은 그야말로 찰떡궁합이라 할 것이다.
 
  창원시는 새로운 통합 상징조형물을 만들고 돝섬에 새로운 시설물을 건립하기 보다는 창원의 근대사적 흔적을 간직한 이 돝섬에 예술가의 혼을 불어 넣고 시민의 애정을 담아 돝섬 자체가 통합시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꾀하여 보았으면 한다.”

 

 

 

 

 

 

 나는 창원 시내에서 “2012 창원조각 비엔날레”하는 커다란 광고탑을 보았고 창원시가 8억이나 되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조각작품을 전시한다고 하기에 뭔가 볼 만한 보물이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이날 보니 완전 실망이었습니다.

 

 사실 언제부턴가 많은 지자체들이 관광상품을 만든다며 아무런 특색도 차별성도 없는 조각공원을 전국 곳곳에 조성해 놓고 있습니다.
 조각공원이 관광상품이 되려면 어느 지역을 찾은 김에 조각공원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공원을 관람하기위해 그 지역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역을 대표할 만한 상징성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 지역의 조각공원과는 뭔가 차별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제안한 취지의 키네틱아트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아직은 흔하지 않고, 조각가들의 작업모습을 보여주자는 제안도 다른 지자체에서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예외적인 시도이므로 이런 것을 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아직은 인지도가 낮은 무명의 작가들이지만 언젠가는 이들이 빛을 발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아직은 시민들에게 생소한 조각이라는 예술장르에 대해 친근감과 이해를 확산해 가자는 의도였습니다.

 

 창원시가 어떤 계기로 돝섬에 8억이나 되는 조각작품을 설치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이 모습은 문화예술사업이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보여주기 행정, 돈 붓기 사업의 토건사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전시된 작품의 작가들은 전국에서 제법 내가 냅네하는 기성작가들로 이런 작가들의 작품은 비싸기도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전국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차별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돝섬을 살아있는 관광명소로 만들고자 한다면 다른 지역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상징성이 있거나 신예이긴 하지만 차별성이 있는 작가들을 유치하여 돝섬을 간 김에 조각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조각작품을 보기 위해 돝섬을 찾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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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비단안개 2012.10.30 1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있어도 없이 보이는 마산, 늘~
    수고 하셨습니다.^^

  2. 장목산 2012.10.30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아 보입니다.
    실비단안개님도 함께 했군요.
    이럴 때는 나를 조수로 체용해서 딜구 다니면 좋을 낀디...

    근데...
    신예이거나 차별성이 있는 작가들 중에서
    돝섬에 들어 갈 사람들이 없어요.
    참... 좋기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인데

  3. 달나무 2012.11.01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산중공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도민일보에서 '바람길'기사보고 선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블로그에 처음 왔는데, 읽을 거리가 너무 많네요.
    아껴 읽어야겠습니다.ㅋㅋ

  4. 이승일 2012.11.09 0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m.cafe.daum.net/masanstory/AY8n/65?listURI=%2Fmasanstory%2FAY8n%3Fprev_page%3D9%26amp%3Bamp%3Bfirstbbsdepth%3D0001I%26amp%3Bamp%3Blastbbsdepth%3D00019%26amp%3Bamp%3BnoticeYn%3D%26amp%3Bamp%3Bpage%3D10
    위에서 말씀하신 합포는 마산 합포입니다.
    지금의 적현공단이 당시의 웅천현입니다.
    위의 자료에서의 지도를 보시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진해의 학개가 아니고 마산의 합포로서
    용마산의 왜군진지에 함포를 쏘아 왜군을 무찌르고
    지금의 수출자유지역의 근주천에 정박해있던
    왜군함 5척을 비롯 전함을 모조리 격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