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의 가북면 용암마을에 눈이 내리니 지난해 눈길에서 길을 묻던 70대 노인이 생각납니다.
 “두 살 위인 형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이곳 용암마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지만 시신이 어디 묻힌 줄 몰라 가끔씩 이 마을에 와서 길가에 소주 한 잔 부어놓고 산을 향해 절만 하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용암마을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종종 그런 일이 있다며 6.25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후 북으로 후퇴하던 북한군 1개 사단이 퇴로를 잃어 가야산과 우두산 일대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국군 3개 사단과 경찰병력이 북한군 토벌작전에 나섰는데 밤에는 북한군이 양식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오고,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음식을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북한군은 군기가 서서 민가에 행패를 부리지 않았는데 한 번은 한 사병이 닭을 잡아가려다가 장교에게 들키자 장교는 그 자리에서 사병을 권총으로 사살해버리는 광경을 목도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국군과 경찰은 밥상과 술상을 차려서 오라하고 반찬이 없으면 ‘우리가 당신들을 지켜주는데 대접이 이게 뭣이냐!’며 밥상을 차버리는 행패까지 부렸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절대 큰길을 다니지 않고 산길을 다니고 국군과 경찰은 주로 큰길을 다녔는데 하루는 경찰 1개 중대가 동네 앞 큰길을 가다가 잠복해 있던 북한군에 의해 전멸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다가 이 동네 이름의 용바위(용암) 고지에서 몇날며칠을 콩을 볶듯 총성을 울리며 총력전을 하다가 결국 북한군은 괴멸되었지만 아군의 사상자 또한 북한군의 수보다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당시 군인이 아닌 마을 청년들은 사망한 국군의 시체를 거적때기로 운반하며 부상병을 업어 나르기도 하고, 총포화기를 지게로 저다 나르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답니다.

 

 지금도 죽바우골이라는 곳에 가면 북한군이 은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 참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눈이 내리는 이런 날에 그들의 춥고 배고픈 참상이 어떠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기도 합니다.
 새벽 포행길에 이곳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그 원혼들이 나타날까 겁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만일 원혼들과 마주친다면 기꺼이 손이라도 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그곳이 안온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곳의 이런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거창군의 도서관과 문화원을 찾아 기록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흔적이 없었습니다.
 거창군의 6.25전쟁사에서 반공연맹 양민학살 사건으로 죽은 원혼들은 위령비라도 세워 위로하고 있지만 그 보다 사상자 규모가 몇십 배 되는 용바위골 전투 사상자의 시신과 원혼들은 눈 내리는 산야 어디에서 잠들어 있는지?

 

 

 

 용암마을에서 전사하여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원혼들과 제단도 없이 산만 쳐다보고 절을 하고 가는 유족들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위령비 하나쯤은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자체나 국가가 나서서 좀 더 증언들을 채집하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한국전쟁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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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산 2013.12.18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래 글은 선비님이 거창군청 전자민원에 올린 위 제안에 대한 답변서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군의 향토이야기와 근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용바위골 전투 위령비 세워야”라는 제안을 해 주신 선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선비님의 제안에 답변을 드리기 위해서는 빨치산과 우리군 지역의 빨치산 전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기에 ‘빨치산 발생’ ‘빨치산 활동’ ‘빨치산 토벌 시작’ ‘거창지역의 빨치산 활동’ ‘거창지역에 국군진입’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빨치산 종결’과 ‘제안에 대한 답변’ 순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1. 빨치산 발생
    6.25 전쟁 중 1950.9.17. 인천상육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병들이 북한군의 지령에 따라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이후 지리산과 덕유산을 근거로 하여 아군의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유격전술로 장기 항전을 결정하였으며, 월동을 위하여 소규모로 흩어져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지내기로 하고, 지리산 노고단, 반야봉, 함양 백운산, 거창 감악산, 달궁, 장악산, 덕유산, 천마산, 칠봉, 삼도봉을 연하여 분산하고 유격지를 설정하였으며, 이들은 남침 후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때까지 점령지내에서 공산주의 사상교육으로 통하여 포섭한 사람들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유격대원으로 편성하였으며, 이와 같은 유격대가 당시의 빨치산입니다.

    2. 빨치산 활동
    빨치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주로 지서와 면사무소)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남북과 경남 일부 지역의 양민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하였으며, 주로 밤이면 산 아래로 내려와 민가를 기습하여 곡식과 짐승을 약탈하였으며,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가 약탈한 곡식 등을 산으로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3. 빨치산 토벌 시작
    빨치산 출몰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빨치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으며, 처음에는 경찰과 지역젊은이로 조직한 반공청년단이 빨치산 에 대응하였으나, 경찰 등의 전투력이 빨치산에 크게 부족하여 빨치산의 점령지역이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또 주변지역까지 확장되었으며, 빨치산의 후방교란으로 그 피해가 날로 커지고, 정규군의 전방 전투에 악영향이 미치자 육군본부에서 빨치산 토벌을 결정하고 1949년 3월 1일 국군 11사단을 빨치산 토벌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4. 거창지역의 빨치산 활동
    거창지역에는 덕유산을 근거로한 빨치산이 북상면과 위천면, 마리면을 점령하고, 거창읍까지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산을 타고 다니며, 고제면과 가북면의 관공서를 습격하여 불태웠고, 해인사까지 진출하였으며, 지리산 빨치산부대 중 감악산을 근거로한 빨지산은 남상면과 신원면, 산청의 차황면과 오부면, 함양의 마천면과 유림면 일원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특히 감악산 빨치산이 악랄하여 신원면 소재지 관공서를 점령하고, 경찰가족까지 살해하는 등 병폐가 매우 심 하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창녕경찰서 경찰들이 이들에게 크게 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5. 거창지역에 국군진입
    창녕경찰의 큰 패전 후인 1951. 2. 4. 빨치산토벌을 위해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처음으로 거창지역에 들어왔으며, 당일은 거창농고 교정에서 숙영을 하고, 다음날 남상면에서 감악산을 수색하며, 신원면을 거처 산청군 차황면으로 빠져나갔습니다.

    6.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2. 8. 오부면 등지에 있든 3대대 후속부대 군인들이 빨치산의 기습으로 대부분 전사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2. 9. 재차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어온 3대대장 한동석 소령과 병력의 행동이 광란으로 돌변, 마을을 방화하고, 전 주민들을 마을 앞 논들로 끌어내어 학살하고,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2. 10.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질러 태우고, 주민들을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계곡에서 학살하였으며, 2. 11. 한동석은 10일 날 3개리에서 끌고 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이들 중 통비분자로 선별한 주민 517명을 박산골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3일간 세 곳에서 희생된 주민이 719여명 이며, 이 사건의 작전명이 “견벽청야”이고, 거창양민학살사건입니다.

    7. 빨치산 종결
    이 후 국군 정규군의 토벌작전으로 거창에서 물러간 빨치산은 지리산의 각 지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아군에게 산발인 공격을 거듭하였으며, 여순반란사건으로 세를 불리기도 하였고, 1963. 11. 12.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8. 제안에 대한 답변
    제안하신 가북면 용암마을 주변에서 발생한 전투는 위와 같은 빨치산 일부 잔당과 경찰(반공청년단 포함)간의 소규모 전투로 추정됩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6.25사변 때 우리 거창군 지역에는 지리산과 덕유산권 빨치산의 주요활동 지역이었든 관계로 산발적인 전투지역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참전경찰도 많으며, 참전경찰 중에는 전사자 또한 다수입니다. 그래서 거창군에서는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근린공원 중앙에 현충시설(위패봉안각, 충혼탑 등)을 건립하여 전몰 군인과 경찰 등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시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6.25사변과 빨치산 전투 중 불행히 전사 하신분과 부상을 당하신분은 모두 국가보훈처에 등록이 되어 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고 있으며, 부상을 입지 않은 참전유공자에 대하여는 국가보훈처에서 매월150,000원씩 참전명예수당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군에서도 별도로 월50,000월씩 참전명예수당을 따로 드리면서 이분들이 작고하셨을 때에는 가족에게 위로금 300,000원을 드리고 있는데 우리군의 명예수당을 내년 1월부터 월80,000원으로 올려서 지급하기로 군 조례를 개정하였습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 국가를 위해 용감하게 참전하신 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그 가족의 명예와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작은 보훈이나마 늘려가고 있다는 말씀으로 숱하게 많은 전투장소 마다 기념시설물을 다 건립하지 못함을 대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