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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23 김영삼 바람에 울고 웃는 부마항쟁 사람들. (2)
  2. 2012.09.25 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13)

김영삼 바람에 울고 웃는 부마항쟁 사람들.

 

 대선 정국을 바라보면서 ‘세상사 요지경’이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옵니다.
 이승만 정권이 싫다며, 박정희 정권이 싫다며, 그리고 민주주의를 돌려달라고,
 목숨까지 내걸고 데모를 하였던 부산, 마산의 시민들이 수구와 독재의 후예인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를 더 선호한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3.15의거와 부마항쟁을 지역의 자부심이요 긍지로 여기며 살아가는 마산시민들의 역사의식과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정상인으로서는 납득할래야 납득을 할 수 없는 괴이한 모순이 있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고래고래 고함은 지르면서도 손가락은 그만 이명박과 같은 사람에게로~~


 이런 현상을 우리는 집단체면 상태라 할까요?

 마산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유신정권에 항거하여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말하자면 수구와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의식이 강한 인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산시민들이 언제부턴가 완전 수구 꼴통이 되었는데 아마도 김영삼 체면에 걸리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마산 사람들은 3.15의거와 10.18부마항쟁을 기억하기나 하는지? 

         김재규의 10.26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차지철에게 무슨 변을  당했을 지?   

         5.18 광주 만행이 부산.마산에서 행하였을지도?   생각만 해도 ~~


 
 마산시민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며 두 번이나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독재정권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전두환 군사정권이 이어졌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좌절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렇게 희망의 불빛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김영삼은 단식투쟁을 통해 새로운 불씨를 지펴 냈습니다.


 이 불씨를 본 부산, 마산의 시민들은 김영삼에게 열광하고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갈라서는 바람에 다시 정권은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내주고 맙니다.
 그러자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며 3당 합당에 뛰어 듭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정치노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보를 한 것입니다.

 

 

-군사독재를 막기위해 김대중과 김영삼이 손을 잡았다가 김영삼은 군사정권과 3당합당을 하고 노무현은 야합이라며 결사 반대를 하고,  그 후 세월이 지난 지금 김무성은 물론이요 김대중의 가신 중의 가신이라는 한광옥마저 새누리당으로 ~~

 

 

 

 .

 

 

 

 

이 대목에서 김영삼이 추구하는 신념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었다면 군사세력이 아닌 민주세력과 손을 잡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세력과 손을 잡으려니 1970년 신민당 후보경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한 전력이 있고 1988년 총선에서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김대중의 평민당에 밀리는 처지였으므로 김대중과 손을 잡고서는 도저히 자신의 집권이 어렵다고 보고 몰짱한 노태우와 김종필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학생시절부터 꿈꾸던 대통령 자리를 기어이 낚아채고 자신의 승리를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자신의 정권을 ‘문민정부’라 이름 붙였습니다만 되돌아 보건데 그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김영삼 권력욕의 승리였을 뿐입니다.

 

 대선정국이 무르익어가는 지금에 와서 경남, 부산 사람들에게 김영삼에 대한 호감을 물으면 좋다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물으면 한마디로 죽일 인간이라며 게거품을 물고 욕을 함니다.

 그러면서도 새누리당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한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 새누리당의 원조인 박정희 유신정권에 목숨 걸고 싸웠던 마산시민,
 -김영삼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던 마산시민.
 -민주세력을 배신한 김영삼.
- 김영삼이 싫어진 마산시민,

- 새누리당의 이명박은 죽도록 미운 마산시민.
 -그러면서도 박정희 후계자는 좋다는 마산시민.

 

 

 이제 3.15의거와 10.18 부마항쟁을 두고 우리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가슴 아팠던, 그러나 아름다웠던  소중한 추억이라고 회상하고 말까요?

 

 

 

 

 

 

                                      >>새누리당의 계보입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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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일오 2012.10.24 1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영삼은 민주인사 가면을 쓴 기회주의 권력 탐욕에 물든
    정치판 마피아의 일개 보스였다.

    민주 저항의 역사를 하루 아침에 친일 유신독재 5공세력 쳐 박아 버렸다.
    그런 기회주의가 친일 박정희나 다를 게 없다.

    유신독재 5공세력에 저항한 민심을 유인 해서 지역주의 선동 민정당 군부독재
    세력에 쳐 박아 버린 역사의 범죄자.

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9월21일, 22일 양일간에 걸쳐 경남도민일보와 그 자회사인 사회적 기업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에서 주관하는 창동예술촌 블로거 팸투어에 가보았습니다.

 창동예술촌 조성사업이 쇠락해 가는 마산의 도심인 창동과 오동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예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하는 통합창원시의 야심찬 도심재생 프로젝터이고, 이날 블로그 팸투어도 이런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홍보전략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마산”이라는 도시는 얼핏 보기엔 지방의 한 작은 도시 같지만 알고 보면 독재정권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 계기를 만든 엄청나게 무게 있는 도시입니다.

 그 계기란 3.15 의거와  부마항쟁 사태입니다.

 


 3.15의거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의 데모였고,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 끔찍한 모습의 사진 한 장이 4.19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맙니다.

 

 

.

 

 

 부마 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들이 시작한 데모가 부산지역 계엄령선포로 마산으로 옮겨와 처음에는 경남대생들이 주축이었으나 차츰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하는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그 심각성을 깨닫고 10월 20일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고, 며칠 후 10월26일 궁정동에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피살되고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맙니다

 

 나는 팸투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역사학자이고 ‘해딴에’의 멤버인 박영주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33년 전 내가 겪었던 사건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나는 79년 3월1일 공무원으로 초임 발령을 받아 당시 마산 월영동 경남대 옆에 있는 창원군청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8일 오후 갑자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만날재 고개로부터 경남대생들이 밀려내려 오고 전투경찰은 영생아파트 쪽에서 올라오며 투석전과 최루탄 전을 하며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데모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수선한 가운데 일과가 끝날 즈음 데모대가 시가지 쪽으로 옮겼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산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박영주씨-

 

 

 당시 내 나이도 대학생 그들과 같은 나이이므로 사태가 궁금키도 하여 창동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3.15탑 부근에서 차에서 내려 부림시장을 지나 창동쪽으로 가는데 모든 가게는 셔터를 내리고 간판 불마저 모두 소등을 하고 사람들이 없으므로 시가지는 마치 장이 서지 않는 날의 장터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창동사거리쯤에 이르자 데모대는 북마산 쪽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전투경찰은 남성동파출소 쪽에서 전투대열을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유리병을 던지며 진격하였고 빈 가게인줄로만 알았던 가게들 쪽문으로 빈병상자를 들고 나오는 학생과 시민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이 데모가 단순히 학생들의 데모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내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순간 맞은 곳을 짚어보니 인중 왼쪽 코 밑 자리에 손가락 하나가 푹 들어가는 상처가 생겼습니다.

 데모대가 던진 깨어진 유리병을 전투경찰이 주워 데모대를 향해 던졌는데 그 중 한 개가 내 얼굴에 박한 것입니다.
 피는 쏟아지고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수건을 건네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갔는데 병원 정문은 닫혀 있고 불도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쪽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고 의외로 병원의 의사와 간호원은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전에 학생들과 병원간에 교감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산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학문당 서점-

내가 유리병을 맞은 곳이 아마 이 근처로 짐작됩니다.

 
 간호사가 상처부위 피를 닦고 의사가 막 찢어진 부위를 집으려고 하는 즈음 나이 많은 할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싸매고 들어오는가 하면 온갖 중상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여 의사는 중상환자들을 돌보기에 바빠 간호사가 내 상처를 아홉 바늘 꿰매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뒷날은 얼굴이 퉁퉁 부어 출근하지 못하고 그 뒷날 출근을 하자 복무기강을 담당하는 내무과장이라는 분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공무원 신분으로 반정부 데모를 하는 현장에 왜 가느냐며 당장 시말서를 쓰 오라고 하였고 나는 시말서를 쓰다 받쳤습니다.


 시말서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유독 시말서를 많이 썼던 문제 공무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장발이라고 시말서, 장발을 시비하므로 빡빡머리를 하고 갔더니 빡빡머리라고 시말서, 빨간 골덴 바지 입었다고 시말서, 운동화 접어 신었다고 시말서... 등등
 오죽했으면 직원들이 “네는 차라리 시말서 등사해 놓고 날짜만 바꿔서 내라.”는 말까지 했을까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구속과 압박이 세상을 짓누르던 시절이 유신시절이었고, 이런 억눌림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민중의 욕구가 분출했던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되돌아보면 그 날 깨진 유리병에 본래 주름진 곳을 맞았기에  다행이지, 만일 눈이나 코에 맞았더라면 이 잘 생긴 얼굴(^v^)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 

 

 그날 나는 “이곳에서 부마항쟁의 흔적은 내 얼굴에 남아있는 이 아홉 바늘 상처 자국뿐이지 아무것도 없다”며 농을 하기도 했지만 정말 33년 전 그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진 창동사거리에는 그날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이라도 창원시에는 그날을 상기할 수 있는 조형물이나 사진 전시장을 이곳 창동사거리에 하나쯤 설치하면 어떨까요?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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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9.25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목줄 짤리지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세여.!
    ㅎㅎㅎ
    그래도 시말서나 쓰고 말았으니 망정이지...
    공무원신분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에는 전두환이 한데
    삼청교육대 끌려 갔을지도 모릅니다.

  2. 커피믹스 2012.09.25 1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의 산 증인이시네요. 크게 안 다친게 다행입니다..
    이번기회에 창원시는 3.15 관련 조형물을 만들거 같네요.

  3. 실비단안개 2012.09.25 2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말서 전문 투사였군요.
    창원군청이 왜 마산에 있었는지요?

    • 땡삐 선비(sunbee) 2012.09.26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남도청이 부산에 있었듯이...
      창원군은 본래 마산,진해,창원시가 모두 창원군었는데 이 도시들이 분가를 하고 진동.진북.진전, 구산,동읍,북면,대산면,내서면,웅동,천가면이 남다가 보니 그 중간지점이고 일제때 부터 청사가 있어서 그랬던것 아닐까요?

  4. 참교육 2012.09.26 0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상 대상자가 되기는 하셨는지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ㅎㅎㅎ

  5. 김천령 2012.09.26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말서 공무원이셨다니... 멋지십니다.
    그날 이야기를 오늘 자세히 듣게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6. Boramirang 2012.10.25 1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하신 경력이십니다. 시말서를 전문적(?)으로 쓰셨으니 말이죠.
    그나저나 선비님의 글을 읽다보니 부마항쟁 당시 모습이 절로 오버랩됩니다.
    안부 전해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

  7. 몇년전 거기살던사람. 2012.11.11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고향은 경기도 용인 이지만 .마산에 일로 우연히 정착해 산 2년여의시간들.
    마산이 잊혀지지 않는 제2의 고향같네요.
    그당시엔 마산이 그리도 싫더니만...
    억세도 드세고,그러나 계산없이 정직한 사람들.
    정치적이긴해도 뭔가 권위나 억압에 반항하는 생활태도등등...
    거기있을땐 잘몰랐는데 각지방마다 정서가 다른데,
    마산은 강하고 큰인물이 나올장소같아요.
    젤싫어하는곳도 마산 젤 그리운곳도마산,
    살고싶은곳도 마산이되었네요.

    저서점 몇번갔던기억이있는데,,,
    조금더 올라가면 떡볶이 파는 분식집들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