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3.20 마산과 김영삼, 그리고 안상수 창원시장후보의 명운은? (8)
  2. 2012.09.25 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13)

 누가 내게 마산이라는 도시가 어떤 도시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마디로 “저항의 도시”라고 이야기 합니다.
 3.15의거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역사를 지닌 엄청난 도시 “마산!”
 세계의 어느 역사를 보드라도 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두 번이나 정권을 무너뜨린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없습니다.
 그래서 3.15와 부마항쟁의 저항정신은 마산시민들의 자랑이요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TV에서 제54주년 3.15의거 기념행사를 보다가 행사장 앞줄에 앉아있는 인사들 면면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이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최루탄과 물대포에 맞서 돌팔매과 화염병을 던지며 “박정희 물러가라! 유신정권 타도하자!”며 핏대를 세우던 사람들이 그 저주의 대상 혈통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새누리당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그런 지지를 얻은 정치인들이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영령 앞에 서서 당신의 뜻을 기린다고 하니 ....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런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나는 이 것을 “김영삼 집단체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음 놓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눈 한번 제대로 돌리지 못하던 박정희 유신정권의 암울한 하늘 아래서 “닭의 목을 비뚤어도 새벽은 온다!”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김영삼은 우리의 희망이요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김영삼이 이 땅에서 독재정권의 나쁜 무리를 물리치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하루빨리 만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 땅에 정치의 봄은 왔음에도 우리의 소망은 이루지지 않고 군사정권이 계속되자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며 여야 3당 합당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는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군사정권에 맞서기 위해 연대한 김영삼과 김대중,

 정권을 잡기 위해 군사정권과 손 잡는 김영삼,

3당 합당이 야합이라며 저항하는 노무현,

 그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이 한 장의 그림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산 사람들은 김영삼을 따라 호랑이굴로 들어가고서는 그만 호랑이굴 지킴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화당 - 민정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하면서 호랑이굴의 간판은 바뀌었지만 그 혈통은 면면히 그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러 간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호랑이 고기를 먹고는 그만 호랑이유전자로 변해버린 것일까요?

이번에 창원시장 후보로 나선 안상수 후보에 대한 경력을 보다가 이 사람도 영락없는 마산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상수 창원시장 후보의 경력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
-대학교 3학년 재학 중,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65년 6월 :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 · 3 항쟁 당시 단식농성에 참가
-1966년 : 이병철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성토대회에 참가,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가 주모자로 유기정학을 받았다.
-1967년 : 여당의 6 · 8 국회의원 선거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자,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집시법'위반으로 재판에 회부, 시국사건에도 연루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75년 :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검사에 임용
-검사에 임용되었으나 학생운동, 노동운동 연루 경력으로 검사발령이 되지 않다가 전주지방검찰청에 발령되었다.
-경향신문 : 객원 논설위원
-1985년 3월 :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아 수사한 후 검사직 사퇴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
-1994년 : 외국인 이주노동자 법률상담소 소장

 

 

 1996년 신한국당 김영삼 총재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하기 전 까지 그의 이력을 보면 그의 유전인자는 새누리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는 박정희 유신정권과 그 후의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경제정의실천운동가였습니다.
 말하자면 박정희 정권에 철저한 안티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박근혜가 명색이 당대표까지 지낸 사람을 공천마저 주지 않은 까닭이 바로 이런 과거전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상후보는 수도권에서 밀려나 변방인 고향으로 돌아와 박근혜의 새누리당 공천을 받겠다며 죽자고 목을 매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장면은 1960~70년대 마산시민들의 꿈이고 등불이었던 인물, 그래서 호랑이굴까지 기꺼이 따라갔던 인물인 김영삼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그토록 미워하고 저항하였던 유신정권의 혈통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마산시민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3.15의거와 부마항쟁 정신을 자랑하지 말든지, 독재와 유신정권의 혈통을 지지하지 말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인데 이 어찌 된 판인지 근자 마산시민들의 행태는 ...????
 이런 장면을 두고 마산을 ‘저항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마산과 창원의 역사를 가만히 되돌아보면,
 시민들의 저항정신이 살아있을 때 도시는 역동성이 있고, 도시가 역동성이 있을 때 시민들의 저항정신 또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저항정신이 살아있던 60~70년대가 마산의 전성기였다가 호랑이굴로 들어간 이후로 마산은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원의 경우도 전국 유일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만들어 낸 지역구가 ‘창원을’ 선거구이고 그 시절(2008 ~ 2012년)이 창원의 최전성기였다가 이제 창원도 서서히 역동성이 살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힘있는 집권여당의 중진의원이 되어 지역발전을 시키겠다고 하는 집권당 다선국회의원들의 말은 만고 공허한 헛소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마산시민이 마산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 안상수 후보를 선택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마산 미래의 향배가 달려있다 보고 그 결과가 매우 궁금합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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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민 2014.03.20 1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산시민들은 변절되었습니다.
    물론 썩어빠진 정치꾼들의 지역감정에
    놀아난 시민들도 있겠지만 이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수많은 피땀을 흘린민주화 영령들에대한
    배신을 하고있는 것이지요,,,,

  2. 참교육 2014.03.21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항의 도시...?
    죽은 지 오래됐습니다.

  3. ㅇㅇ 2014.03.21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와는 사회상이 많이 변한탓도 있지 않을까요?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sns의 생활화로
    모든 토론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젊은 세대의 정치의 세력화를 이루는 공간은 각자간의 sns를
    통하는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더욱더 지역간의 세력고착화가 심해지는거 같은 느낌이랄까....

  4. d 2014.06.06 0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의 디트로이트로 불리는 침체된 마산을 살릴 정치인을 뽑는게 급선무죠.
    지금이 독재군부정권도아닌데 새누리가 악이고 민주당이 선도 아닌것이고..

마산 창동의 끔찍했던 사건.

 

 

 9월21일, 22일 양일간에 걸쳐 경남도민일보와 그 자회사인 사회적 기업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에서 주관하는 창동예술촌 블로거 팸투어에 가보았습니다.

 창동예술촌 조성사업이 쇠락해 가는 마산의 도심인 창동과 오동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예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보고자 하는 통합창원시의 야심찬 도심재생 프로젝터이고, 이날 블로그 팸투어도 이런 사실을 전국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홍보전략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마산”이라는 도시는 얼핏 보기엔 지방의 한 작은 도시 같지만 알고 보면 독재정권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 계기를 만든 엄청나게 무게 있는 도시입니다.

 그 계기란 3.15 의거와  부마항쟁 사태입니다.

 


 3.15의거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의 데모였고,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 끔찍한 모습의 사진 한 장이 4.19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맙니다.

 

 

.

 

 

 부마 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들이 시작한 데모가 부산지역 계엄령선포로 마산으로 옮겨와 처음에는 경남대생들이 주축이었으나 차츰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하는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그 심각성을 깨닫고 10월 20일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고, 며칠 후 10월26일 궁정동에서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피살되고 유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맙니다

 

 나는 팸투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역사학자이고 ‘해딴에’의 멤버인 박영주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33년 전 내가 겪었던 사건을 상기해 보았습니다.
 나는 79년 3월1일 공무원으로 초임 발령을 받아 당시 마산 월영동 경남대 옆에 있는 창원군청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0월 18일 오후 갑자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만날재 고개로부터 경남대생들이 밀려내려 오고 전투경찰은 영생아파트 쪽에서 올라오며 투석전과 최루탄 전을 하며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데모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수선한 가운데 일과가 끝날 즈음 데모대가 시가지 쪽으로 옮겼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산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박영주씨-

 

 

 당시 내 나이도 대학생 그들과 같은 나이이므로 사태가 궁금키도 하여 창동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3.15탑 부근에서 차에서 내려 부림시장을 지나 창동쪽으로 가는데 모든 가게는 셔터를 내리고 간판 불마저 모두 소등을 하고 사람들이 없으므로 시가지는 마치 장이 서지 않는 날의 장터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창동사거리쯤에 이르자 데모대는 북마산 쪽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전투경찰은 남성동파출소 쪽에서 전투대열을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유리병을 던지며 진격하였고 빈 가게인줄로만 알았던 가게들 쪽문으로 빈병상자를 들고 나오는 학생과 시민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는 ‘이 데모가 단순히 학생들의 데모만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내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순간 맞은 곳을 짚어보니 인중 왼쪽 코 밑 자리에 손가락 하나가 푹 들어가는 상처가 생겼습니다.

 데모대가 던진 깨어진 유리병을 전투경찰이 주워 데모대를 향해 던졌는데 그 중 한 개가 내 얼굴에 박한 것입니다.
 피는 쏟아지고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수건을 건네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골목길을 따라 갔는데 병원 정문은 닫혀 있고 불도 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쪽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고 의외로 병원의 의사와 간호원은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전에 학생들과 병원간에 교감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마산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학문당 서점-

내가 유리병을 맞은 곳이 아마 이 근처로 짐작됩니다.

 
 간호사가 상처부위 피를 닦고 의사가 막 찢어진 부위를 집으려고 하는 즈음 나이 많은 할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싸매고 들어오는가 하면 온갖 중상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여 의사는 중상환자들을 돌보기에 바빠 간호사가 내 상처를 아홉 바늘 꿰매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뒷날은 얼굴이 퉁퉁 부어 출근하지 못하고 그 뒷날 출근을 하자 복무기강을 담당하는 내무과장이라는 분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공무원 신분으로 반정부 데모를 하는 현장에 왜 가느냐며 당장 시말서를 쓰 오라고 하였고 나는 시말서를 쓰다 받쳤습니다.


 시말서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유독 시말서를 많이 썼던 문제 공무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장발이라고 시말서, 장발을 시비하므로 빡빡머리를 하고 갔더니 빡빡머리라고 시말서, 빨간 골덴 바지 입었다고 시말서, 운동화 접어 신었다고 시말서... 등등
 오죽했으면 직원들이 “네는 차라리 시말서 등사해 놓고 날짜만 바꿔서 내라.”는 말까지 했을까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런 구속과 압박이 세상을 짓누르던 시절이 유신시절이었고, 이런 억눌림에서 해방되고자 했던 민중의 욕구가 분출했던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되돌아보면 그 날 깨진 유리병에 본래 주름진 곳을 맞았기에  다행이지, 만일 눈이나 코에 맞았더라면 이 잘 생긴 얼굴(^v^)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 

 

 그날 나는 “이곳에서 부마항쟁의 흔적은 내 얼굴에 남아있는 이 아홉 바늘 상처 자국뿐이지 아무것도 없다”며 농을 하기도 했지만 정말 33년 전 그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진 창동사거리에는 그날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이라도 창원시에는 그날을 상기할 수 있는 조형물이나 사진 전시장을 이곳 창동사거리에 하나쯤 설치하면 어떨까요?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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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넘어 2012.09.25 18: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목줄 짤리지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세여.!
    ㅎㅎㅎ
    그래도 시말서나 쓰고 말았으니 망정이지...
    공무원신분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에는 전두환이 한데
    삼청교육대 끌려 갔을지도 모릅니다.

  2. 커피믹스 2012.09.25 1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의 산 증인이시네요. 크게 안 다친게 다행입니다..
    이번기회에 창원시는 3.15 관련 조형물을 만들거 같네요.

  3. 실비단안개 2012.09.25 2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말서 전문 투사였군요.
    창원군청이 왜 마산에 있었는지요?

    • 땡삐 선비(sunbee) 2012.09.26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남도청이 부산에 있었듯이...
      창원군은 본래 마산,진해,창원시가 모두 창원군었는데 이 도시들이 분가를 하고 진동.진북.진전, 구산,동읍,북면,대산면,내서면,웅동,천가면이 남다가 보니 그 중간지점이고 일제때 부터 청사가 있어서 그랬던것 아닐까요?

  4. 참교육 2012.09.26 0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상 대상자가 되기는 하셨는지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ㅎㅎㅎ

  5. 김천령 2012.09.26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말서 공무원이셨다니... 멋지십니다.
    그날 이야기를 오늘 자세히 듣게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6. Boramirang 2012.10.25 13: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하신 경력이십니다. 시말서를 전문적(?)으로 쓰셨으니 말이죠.
    그나저나 선비님의 글을 읽다보니 부마항쟁 당시 모습이 절로 오버랩됩니다.
    안부 전해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

  7. 몇년전 거기살던사람. 2012.11.11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고향은 경기도 용인 이지만 .마산에 일로 우연히 정착해 산 2년여의시간들.
    마산이 잊혀지지 않는 제2의 고향같네요.
    그당시엔 마산이 그리도 싫더니만...
    억세도 드세고,그러나 계산없이 정직한 사람들.
    정치적이긴해도 뭔가 권위나 억압에 반항하는 생활태도등등...
    거기있을땐 잘몰랐는데 각지방마다 정서가 다른데,
    마산은 강하고 큰인물이 나올장소같아요.
    젤싫어하는곳도 마산 젤 그리운곳도마산,
    살고싶은곳도 마산이되었네요.

    저서점 몇번갔던기억이있는데,,,
    조금더 올라가면 떡볶이 파는 분식집들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