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바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12.11 거창군 용바위골 전투 위령비 세워야. (1)
  2. 2013.01.21 눈길 산행 유의사항. (2)
  3. 2012.12.31 거창 용암리에서 용의 실체를 보다. (2)

  거창의 가북면 용암마을에 눈이 내리니 지난해 눈길에서 길을 묻던 70대 노인이 생각납니다.
 “두 살 위인 형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이곳 용암마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지만 시신이 어디 묻힌 줄 몰라 가끔씩 이 마을에 와서 길가에 소주 한 잔 부어놓고 산을 향해 절만 하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용암마을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종종 그런 일이 있다며 6.25전쟁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후 북으로 후퇴하던 북한군 1개 사단이 퇴로를 잃어 가야산과 우두산 일대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국군 3개 사단과 경찰병력이 북한군 토벌작전에 나섰는데 밤에는 북한군이 양식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오고,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음식을 달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북한군은 군기가 서서 민가에 행패를 부리지 않았는데 한 번은 한 사병이 닭을 잡아가려다가 장교에게 들키자 장교는 그 자리에서 사병을 권총으로 사살해버리는 광경을 목도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국군과 경찰은 밥상과 술상을 차려서 오라하고 반찬이 없으면 ‘우리가 당신들을 지켜주는데 대접이 이게 뭣이냐!’며 밥상을 차버리는 행패까지 부렸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군은 절대 큰길을 다니지 않고 산길을 다니고 국군과 경찰은 주로 큰길을 다녔는데 하루는 경찰 1개 중대가 동네 앞 큰길을 가다가 잠복해 있던 북한군에 의해 전멸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다가 이 동네 이름의 용바위(용암) 고지에서 몇날며칠을 콩을 볶듯 총성을 울리며 총력전을 하다가 결국 북한군은 괴멸되었지만 아군의 사상자 또한 북한군의 수보다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당시 군인이 아닌 마을 청년들은 사망한 국군의 시체를 거적때기로 운반하며 부상병을 업어 나르기도 하고, 총포화기를 지게로 저다 나르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답니다.

 

 지금도 죽바우골이라는 곳에 가면 북한군이 은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 참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눈이 내리는 이런 날에 그들의 춥고 배고픈 참상이 어떠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기도 합니다.
 새벽 포행길에 이곳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그 원혼들이 나타날까 겁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만일 원혼들과 마주친다면 기꺼이 손이라도 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그곳이 안온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곳의 이런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거창군의 도서관과 문화원을 찾아 기록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흔적이 없었습니다.
 거창군의 6.25전쟁사에서 반공연맹 양민학살 사건으로 죽은 원혼들은 위령비라도 세워 위로하고 있지만 그 보다 사상자 규모가 몇십 배 되는 용바위골 전투 사상자의 시신과 원혼들은 눈 내리는 산야 어디에서 잠들어 있는지?

 

 

 

 용암마을에서 전사하여 시신조차 거두지 못한 원혼들과 제단도 없이 산만 쳐다보고 절을 하고 가는 유족들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위령비 하나쯤은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지자체나 국가가 나서서 좀 더 증언들을 채집하고 기록들을 조사하여 한국전쟁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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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산 2013.12.18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래 글은 선비님이 거창군청 전자민원에 올린 위 제안에 대한 답변서 내용입니다.

    먼저, 우리군의 향토이야기와 근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용바위골 전투 위령비 세워야”라는 제안을 해 주신 선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선비님의 제안에 답변을 드리기 위해서는 빨치산과 우리군 지역의 빨치산 전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되기에 ‘빨치산 발생’ ‘빨치산 활동’ ‘빨치산 토벌 시작’ ‘거창지역의 빨치산 활동’ ‘거창지역에 국군진입’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빨치산 종결’과 ‘제안에 대한 답변’ 순으로 답변을 드립니다.

    1. 빨치산 발생
    6.25 전쟁 중 1950.9.17. 인천상육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병들이 북한군의 지령에 따라 지리산으로 숨어들었고, 이후 지리산과 덕유산을 근거로 하여 아군의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유격전술로 장기 항전을 결정하였으며, 월동을 위하여 소규모로 흩어져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지내기로 하고, 지리산 노고단, 반야봉, 함양 백운산, 거창 감악산, 달궁, 장악산, 덕유산, 천마산, 칠봉, 삼도봉을 연하여 분산하고 유격지를 설정하였으며, 이들은 남침 후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때까지 점령지내에서 공산주의 사상교육으로 통하여 포섭한 사람들을 공산당에 입당시켜 유격대원으로 편성하였으며, 이와 같은 유격대가 당시의 빨치산입니다.

    2. 빨치산 활동
    빨치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주로 지서와 면사무소)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남북과 경남 일부 지역의 양민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하였으며, 주로 밤이면 산 아래로 내려와 민가를 기습하여 곡식과 짐승을 약탈하였으며,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가 약탈한 곡식 등을 산으로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3. 빨치산 토벌 시작
    빨치산 출몰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빨치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으며, 처음에는 경찰과 지역젊은이로 조직한 반공청년단이 빨치산 에 대응하였으나, 경찰 등의 전투력이 빨치산에 크게 부족하여 빨치산의 점령지역이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또 주변지역까지 확장되었으며, 빨치산의 후방교란으로 그 피해가 날로 커지고, 정규군의 전방 전투에 악영향이 미치자 육군본부에서 빨치산 토벌을 결정하고 1949년 3월 1일 국군 11사단을 빨치산 토벌 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4. 거창지역의 빨치산 활동
    거창지역에는 덕유산을 근거로한 빨치산이 북상면과 위천면, 마리면을 점령하고, 거창읍까지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산을 타고 다니며, 고제면과 가북면의 관공서를 습격하여 불태웠고, 해인사까지 진출하였으며, 지리산 빨치산부대 중 감악산을 근거로한 빨지산은 남상면과 신원면, 산청의 차황면과 오부면, 함양의 마천면과 유림면 일원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특히 감악산 빨치산이 악랄하여 신원면 소재지 관공서를 점령하고, 경찰가족까지 살해하는 등 병폐가 매우 심 하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출동한 창녕경찰서 경찰들이 이들에게 크게 패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5. 거창지역에 국군진입
    창녕경찰의 큰 패전 후인 1951. 2. 4. 빨치산토벌을 위해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처음으로 거창지역에 들어왔으며, 당일은 거창농고 교정에서 숙영을 하고, 다음날 남상면에서 감악산을 수색하며, 신원면을 거처 산청군 차황면으로 빠져나갔습니다.

    6.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2. 8. 오부면 등지에 있든 3대대 후속부대 군인들이 빨치산의 기습으로 대부분 전사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2. 9. 재차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어온 3대대장 한동석 소령과 병력의 행동이 광란으로 돌변, 마을을 방화하고, 전 주민들을 마을 앞 논들로 끌어내어 학살하고,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2. 10.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질러 태우고, 주민들을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계곡에서 학살하였으며, 2. 11. 한동석은 10일 날 3개리에서 끌고 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이들 중 통비분자로 선별한 주민 517명을 박산골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3일간 세 곳에서 희생된 주민이 719여명 이며, 이 사건의 작전명이 “견벽청야”이고, 거창양민학살사건입니다.

    7. 빨치산 종결
    이 후 국군 정규군의 토벌작전으로 거창에서 물러간 빨치산은 지리산의 각 지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아군에게 산발인 공격을 거듭하였으며, 여순반란사건으로 세를 불리기도 하였고, 1963. 11. 12.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8. 제안에 대한 답변
    제안하신 가북면 용암마을 주변에서 발생한 전투는 위와 같은 빨치산 일부 잔당과 경찰(반공청년단 포함)간의 소규모 전투로 추정됩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6.25사변 때 우리 거창군 지역에는 지리산과 덕유산권 빨치산의 주요활동 지역이었든 관계로 산발적인 전투지역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참전경찰도 많으며, 참전경찰 중에는 전사자 또한 다수입니다. 그래서 거창군에서는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근린공원 중앙에 현충시설(위패봉안각, 충혼탑 등)을 건립하여 전몰 군인과 경찰 등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시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6.25사변과 빨치산 전투 중 불행히 전사 하신분과 부상을 당하신분은 모두 국가보훈처에 등록이 되어 국가유공자로 예우를 받고 있으며, 부상을 입지 않은 참전유공자에 대하여는 국가보훈처에서 매월150,000원씩 참전명예수당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군에서도 별도로 월50,000월씩 참전명예수당을 따로 드리면서 이분들이 작고하셨을 때에는 가족에게 위로금 300,000원을 드리고 있는데 우리군의 명예수당을 내년 1월부터 월80,000원으로 올려서 지급하기로 군 조례를 개정하였습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 국가를 위해 용감하게 참전하신 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그 가족의 명예와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작은 보훈이나마 늘려가고 있다는 말씀으로 숱하게 많은 전투장소 마다 기념시설물을 다 건립하지 못함을 대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절집에 있는 동안 주변 산들을 둘러보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계속 눈이 내리는 바람에 미루고 미루다가 지난 토요일에는 큰마음을 먹고 3~4시간 코스의 산을 타기로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래 가기로 했던 코스는 가지도 못하고 무려 8시간의 산행을 하면서 죽도록 고생을 하였습니다.

 고생을 하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먼저 산 아래서 보는 산의 눈과 산에 올라 보는 눈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산 아래서 보면 나무에 가려 눈이 없어 보이는데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눈의 깊이는 깊어집니다.
 그 까닭은 고지대일수록 기온이 낮아 눈이 녹지 않으므로 그해 내린 눈이 차곡차곡 그대로 쌓여 있는 것입니다.
 본래 계획은 홍감마을에서 단지봉을 올랐다가 내촌마을로 가기로 하였는데 산 능선에 오르고 보니 내촌쪽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있어 용바위를 거쳐 용암마을로 내려오기로 하였습니다.

 

 

-홍감마을에서 본 단지봉이라는 산입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 여기서부터 등산로입니다(삼각대 셀프로 기념 ㅋㅋ)

 

 

-저지대에서는 돌도 흙도 보입니다.

 

 

-고지대에는 눈이 많이 쌓여 아예 눈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산 능선에서 바라보니 단지봉과 용바위의 거리가 비슷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착시현상이었습니다. 맑고 맑은 공기에서의 1~2키로미터의 거리는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중간에서 만난 이정표를 보고야 알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눈길에서의 보행동작과 아이젠의 무게입니다.
 무르팍이 빠지는 깊이의 눈길을 걷는 발걸음은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걸어야 합니다.
 눈길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착용한 아이젠에는 눈이 얼어붙어 점점 부피가 커져 신발의 무게가 엄청 무거워집니다.
 몇 시간동안 아이젠을 차고 걷다가 하도 지쳐 아이젠을 벗어버렸습니다.
 눈이 녹지 않은 음지에서는 아이젠을 벗어도 괜찮은데 눈이 녹아 땅과 낙엽이 보이는 양지에서는 오히려 아이젠을 신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흙과 낙엽 아래의 땅은 얼어있는 빙판이기 때문입니다.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한과 대여섯 개 먹고서는 저녁 6시까지 걸었으니

 배는 고프고,
 체력은 바닥나고,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찬바람은 불어오고,
 핸드폰 신호는 잡히지 않고,
 . . . .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겠지요.

이날 가야산과 수도산을 포함 주변의 산을 완전 혼자 독차지 한 셈이죠. ㅋㅋ

 

 

 

 그나마 눈길을 8시간동안  걸을 수 있었던 것은 108배 덕분 아닌가 싶습니다.
 부처님이 도와줬다는 뜻이 아닙니다.
 108배를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동작이 전신운동에다가 여간 에너지 소모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요즘 절집에 있으면서 눈 때문에 산행도 할 수 없으므로 이 108배를 새벽에 3번, 저녁에 1번, 그러니까 432배를 하는 셈이니까 꽤 운동이 된 셈이지요.
 
 아무튼 마을에 도착하여 절집에 가려니 아침에 밥솥을 다 긁어먹었기에 새로 밥을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그냥 노인정엘 가서 할머니들께 밥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참으로 큰일 날 뻔 했다며 과거 약초 켜러 다니다가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한 자신들의 이야기며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풀어놓았습니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마을 사람들도 까딱 잘 못하면 그러 한데 길도 모르는 사람이 해지기 전에 이렇게 돌아와 준 것만 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부처님 덕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넝쿨나무가  제 살자고 모체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갔다가 모체나무가 죽자 자신도 따라 죽었습니다.

 공생이 아닌 공멸의 본보기입니다.

 

 

 

-마치 까치집 모양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는 겨우살이라는 것들입니다.

모든 나무들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동면에 들어간 이 시간  이 기생식물은 오히려 푸른 빛으로 몸집을 키워갑니다.

 

 

 

 눈 내린 산을 등산하는 분들에게 알립니다.

 

 나 홀로 산행은 가급적 삼가,
 핸드폰 예비 밧대리와  조난 신호탄 준비,
 하루분의 식량과 여벌 방한복과 침낭 준비,
 아이젠과 지팡이를 반드시 챙겨 가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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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3.01.21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 제대로 공부하셨네요.

    전 대학시절...한겨울 주왕산에서 해가 떨어져 죽음의 공포를 느낀 후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닙니다.

 내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의 용암선원이라는 절집에 들어오면서 왜 지명을 ‘용암리’라고 하였는지 궁금하여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두산백과사전에 등록된 용암리라는 마을이 무려  40개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이 곳 용암마을의 소개는 두산백과사전에 간단히 언급되어 있고 블로그나 카페와 같은 곳에서 소개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두산백과사전에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그렇고 이 동네 이름이 용암리라고 붙여진 이유는 동네 뒷산의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바위 또는 용바위라 하고, 이 바위 이름을 따서 용암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여 나는 용머리처럼 생겼다는 바위를 보고자 두 번을 바위까지 올라가 보았습니다만 도무지 용머리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12월 29일 죽바위골이라는 쪽으로 포행길을 나섰다가 눈 덮인 산을 쳐다보다가 “아~  바로 이거로구나!”하고 그 위용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어흥~’하며 당장 튀어나올 듯 한 형상이  아닌가요?

 

 

              -용바위입니다.-

 

 

  거창의 가조면은 가조온천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팔팔고속도로에서 IC도 있어 대체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접한 가북면은 거창군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로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용암리라는 마을은 가북면소재지에서 하천을 따라 올라가는 산골마을로 용암리라는 법적명칭의 행정구역 안에는 용암본부락, 개금마을, 장전마을, 홍감마을, 송정마을 5개 자연취락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용암본부락은 기온이 따뜻하여 보리농사가 잘되어 사람이 가장 많이 살았고, 1960년대 전후로는 세대수가 90여호가 넘을 정도였다합니다.

 

     - 동네 입구 좌측에는 음석바위, 우측에는남근석바위가 있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음석바위인데 음기가 세다하여 옛날에는 안에 돌을 쌓고 제를 지냈다 합니다 

 

(남근석인데 보기로는 아직도 힘이 있는 듯 한데   여~ㅇ 아닌가 봅니다. ㅋㅋ)

 

(음석바위 안  돌을 쌓은 모습)

 

 

( 그리고 이 바위는 하천 건너편으로 음석과 남근석 중간에 있는 바위인데

 마치 두 바위의 합궁으로 용의 알이라도 낳은 듯하므로

 오늘부터 이 바위를 ‘용란석’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건축이 전공이고 생태도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연히 풍수지리를 접하고서는 “바로 이거다!”하며 풍수지리에 감탄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조상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지관들이 보는 소위 음택이 풍수지리의 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본 풍수지리는 주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보는 관점에서 바람과 물과 지형을 잘 이용하면 생태적인 환경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이 풍수지리 이론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나는 요즘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의 지형을 살피고 자연환경과 인문환경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고 이 마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는 용바위로부터 산맥이 뻗어 내려와 양 갈래로 갈라진 지형은 마치 여성의 자궁과 같은 형상에 뒤로는 북쪽 산이요 앞으로는 남쪽 하천이 흐르는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좋은 양택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네이버 지도에서 본 용암마을 항공사진. 

  (노란선이 산능선입니다)

 

 


 그렇다면 그리 좋은 양택지라면 계속 마을이 번성하여야 할 것인데 왜 쇠퇴해 가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답을 나도 이곳에서 생활해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내릴 때 마다 눈 치우는 작업을 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이 마을의 지형은 경사도가 15도가 넘는 가파른 경사지입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농사를 지을 때는 모두 지게를 지고 농사를 지으므로 농업용수 풍부하고, 배수 잘되고, 일조량 풍부하면 경사도 정도는 까짓것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계화영농이 시작되면서부터 영농기계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지형의 농지는 쓸모없는 전답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거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겨우내 눈이 내리는 동네에서 경사진 빙판길은 사람도 얼씬하기 어려운 판이니 자동차야 있으나마나 한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지요.
 눈만 왔다하면 대중교통이 가장 먼저 중단되고 마니 하필 이런 날에 응급상황이라도 생기면 하늘 말고는 원망할 곳도 없이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것이 산골의 실정입니다.

 

 

- 차도에서 본 마을의 전경입니다.

   (큰길가에 있는 집만 새집을 지었네요. 동네 안에는 당장 레미콘차가 들어가기도 힘이 들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세월 따라 사람이 가고,
 사람 따라 집이 가고,
 집 따라 마을이 가고,
 ........
 자연의 이치인가 봅니다.

 

.......................................................................................................................

 어제부터 가조온천에 목욕가려고 했는데 버스가 오지 않는 바람에 못했는데,
 어제 밤에 내린 눈 때문에 오늘도 기약을 할 수 없다고 하네요.

 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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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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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2.12.31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근바위가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가서
    정기라도 좀 받아 와야 할 거 같은디...
    눈 땜시 버스도다니지 않는다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