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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2 명당자리 임자는 따로 있다.- 남명조식의 생가 터. (1)
  2. 2014.09.28 과부와 고아의 정치, 그리고 남명의 선비정신 (1)

 오늘은 지난 9월23일 한국컨텐츠진흥원,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경남 이야기’의 블로거 탐방대 두 번째 이야기로 남명 조식의 생가 터와 명당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풍수지리(風水地理)는 바람기운, 물기운, 땅기운의 이치로 어느 터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길흉을 맞이한다고 하여 우리네 조상들은 명당터를 두고 다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명당의 터와 그를 차지하는 주인은 마치 전기와 전구와 같이 서로 궁합이 맞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흐르는 전류는 200V인데 100V전구를 꽂으면 전구가 타버리고, 반대로 하면 전구가 작동하지지 않는가 하면 전선이 잘못 연결되어 누전이 있을라치면 화재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서로 엇갈리지 않으면서 넘침도 부족함도 없는 가운데 터의 기운과 사람이 기운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그 땅은 길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역학으로 사주를 보거나 점집에 가서 점을 치거나 간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당사자의 태어난 년.월.일.시입니다.
 아무리 명당 터가 있을지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일과 죽은 사람의 사망일이 그 터와 궁합이 맞아야 길지가 되고 발복을 한다고 합니다.
 태어나는 사람이 제가 태어나고 싶다고 임의로 태어날 수도 없고, 죽는 사람이 땅 기운의 시간에 맞춰 죽을 수도 없는 입장이고 보면 명당 터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명의 생가 터가 딱 그런 것 같습니다.

 

 

 

 

 남명(南冥)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曹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이씨(仁川李氏)인데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인데 남명의 본가는 본래 판현인데 외가인  삼현 토동(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1501년 음력 6월 26일 태어났습니다.
 옛날 어느 풍수도인이 합천군 삼가면 토(兎)동을 둘러보니 암토끼가 달에 있는 수토끼를 쳐다보고 누워있는 형상이니 토끼의 배에 터를 잡은 집에서 1년 내 현자가 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토끼의 배 부분에 위치한 집이 남명의 외가였고 1년 뒤 예언대로 남명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외조부인 이국은 친자인 이씨 자손 중에서 현자가 나기를 바랐는데 하필이면 그때에  딸이 친정에 와서 해산을 하는 바람에 이씨 기운을 조씨가 앗아간 형국이 되었으니 이점이 못내 아쉬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쯤 되고 보면 명당과 그 주인공의 인연은 따로 있음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명이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세의 오늘날에 칭송을 받는 현자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살아생전 일생을 되짚어보면 그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팔자를 타고났다고 할 것입니다.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당대의 퇴계 이황이 문과 회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남명은 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치른 과거시험이긴 해도 문과 초시에는 급제를 하였지만 회시에는 낙방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백수 처사로  일생을 삽니다.
 넉넉잖은 살림살이에 벼슬도 없는 백수 선비의 삶이란 게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고향인 합천에서의 궁핍한 생활고 때문데 한때 김해에서 처가살이를 할 정도였으니 보통의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좋은 팔자로 산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남명의 생가-

 

 

 그렇다면 명당터의 덕을 본 당자는 터 주인인 외할아버지이숙도 아니고 이곳에서 태어난 남명도 아닌 셈인데 그럼 도대체 누가 명당터의 덕을 본 것일까요?
 내가 보기로는 결국 나라가 덕을 봤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남명 조식은 비록 공직에 몸을 담지는 않았지만 재야에서 늘 나랏일을 걱정하고 현직에 공직자들로 하여금 공직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도록 긴장케 하는 상소문 돌직구를 날려 난세에 그나마 선비정신을 유지하게 하였고, 후학들을 잘 지도하여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는 50여명이 넘는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나서게 하여 나라를 지키게 하였으니 결국 명당터의 덕을 본 당자는 나라인 것입니다.

 

 명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와 관련해서 사사로운 내 경험 두 가지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먼저 내 아버지 산소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59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해에 따라 아버지께서 수시로 “우리가 죽기 전에 자식들한테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면 우리가 묻힐 자리는 우리가 장만해 놓아야 할 텐데...”하며 고향의 누구누구네 밭을 지목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차츰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보니 부득이 선산의 할아버지 묘 아래에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할머니께서 생존해 계시므로 아버지가 그곳에 먼저 묻히고 나면 할머니가 할아버지 옆에 묻힐 수 없다며 집안 어른들이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3일의 장례기간 안에 갑자기 산소 터를 구하려니 낭패가 예사 낭패가 아닙니다. 해서 고향을 지키고 계신 막내 삼촌한테 부탁을 하였는데 삼촌은 온 산천을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쉬었다 가자며 마을 공동묘지가의 바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아차!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하고 무릎을 치고 “바로 이 자리다!”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는 과거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를 오를 때 숨이 가빠 상여가 쉬어가는 자리였는데 공동묘지에 자동차 길이 생기는 바람에 방치된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산소를 쓰기로 하고 삼촌이 풍수가에 찾아가니 “허허~ 그 자리는 내가 안 봐도 이미 알고 있는 명당 터일세. 그 터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노인네들이 몇몇이 있는데 자네 형이 거기 묻히다니, 자네 형이 무슨 복을 얼마나 지었기에 그 터 주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네만 명당 터 주인은 따로 있다더니 참으로 그러하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부모님 산소 전경이데 경치가 하도 좋아 이곳에 서면 쉬원하면서도 편안한 기운을 느끼죠-

 

 

 내 경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나는 풍수지리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도 없고 역술인이나 풍수가들의 말을 신뢰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내가 풍수지리를 어깨너머로 공부하고 이해하는 명당은 햇빛 잘 들고, 통풍 잘되고, 경치 좋고, 비바람으로 인한 재해가 없는 자리가 명당이라고 여기는 편이고 이런 관점에서 내가 사는 집터를 고르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7년 전 내가 사는 집 일부가 공공사업에 편입되어 대지 100평 중 40평이 편입되고 건물을 철거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대지가 협소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 볼까하고 귀산동 일대 땅을 물색하다가 석교마을에 있는 적당한 땅을 발견하고 그 동네 사람에게 그 터를 살 방법이 없겠냐고 타진을 해 보았습니다. 그 터 주인은 현재 엄청난 부자라서 땅을 팔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포기를 하고 결국 내가 살던 터에 집을 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터에 집을 짓고 있어 이 어찌된 영문인가하고 알고 보니 터 주인이 마을노인회관부지로 내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명당 터가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을주민 공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참으로 다행하고 신통한 일이다.” 라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 두 경험에서 소위 명당 터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리 명당 터에 묻혔다고 하지만은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불행한 명운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토록 팔지 않겠다던 명당 터가 어찌 욕심  없는 마을 공동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사람의 운명도 땅의 운명도 모두가 하늘의 뜻이 아닐까요?

 남명의 외할아버지 이숙처럼 기왕이면 내 자손이 번창하였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진 이나,

 조상 산소 덕으로 부귀영화를 기대하는 이나,

 내가 명당을 찾기보다는 명당이 나를 찾도록 선을 행하고 복을 지음이 어떠할까요. ㅎㅎㅎ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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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판준 2015.01.13 1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여년전 산천재에 다녀왔는데 참으로 공부 많이했다 단성소 같은 글을 쓰려면 얼마나 위험했을가요 생가가 삼가면 외토리
    내고향하고도 몇리 안되는곳인데 거기서 한국사에 길이 남은 유적특히 경남 교육자등은 모두 남명선생의 문하인이라던데
    경남분들 모두 장합니다 삼가면에서도 그 큰 대 인물을낳게했으니 합천고을도 대단하리라 내가 글이짧아서 대구는 잘못해도
    전신은 조식선생님의 유훈을 길이 간직하고 잇는데요 산청군민도 대단한 고을양반이롤세 대구 부산 마산진주전주등지의 선비들은 남명선생의 유훈을 본 받아야 할것미

 지난 9월23일 한국컨텐츠진흥원,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경남 이야기’의 블로거 탐방대의 일원으로 합천을 찾았습니다.
 합천군 삼가는 남명이 태어난 곳으로 남명이 일생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고장입니다.
 그럼에도 환갑이 넘은 노년에 일생을 마감하고자 지리산 아래 산청군 덕천에 가서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지냈던 인연으로 마치 산청군이 남명의 출신지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산청군에서는 산청군을 ‘선비의 고장’이라며 그 중심인물로 남명을 내세우면서 유적지와 기념관을 건립하여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는데 비하여 합천군은 지금까지 이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뇌룡정-

-용암서원-

-남명 생가-


 그러다 최근에 와서 인문학이 강조되고 그 연장선에서 우리나라의 선비정신과 남명 사상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합천군에서도 남명의 문화적 가치와 유적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관광사업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날 우리는 뇌룡정 - 용암서원 - 남명생가를 둘러보았는데 남명 조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가 아니고, ‘사람은 죽어서 정신을 남긴다’는 생각 말입니다.

 

 조선시대 사림의 ‘영남학파의 양대산맥’하면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입니다.
 퇴계이황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치무대에서 점진적인 개혁으로 훈구파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사림의 선비들의 입지를 만들어 주었다면 남명조식은 재야에서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행하여야 할 진정한 덕목이 무엇인가를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남명은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선비가 굳이 중앙정부의 관료가 되어야만 국가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이를 모두 사양하였습니다.
 대신에 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진력하였습니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신조로 삼았으며, 그가 노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리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 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 자를 써 붙이고, 또한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 칼에는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고 하는 글귀를  새겼다고 합니다.

 ‘경’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수양하는 것이라면, ‘의’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이룩하려는 것으로, 그는 서푼어치 지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대신 깊은 학문탐구와 사유로 흔들림이 없는 단단한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직설을 하여 정의를 세우고 민본국가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남명은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안위가 걱정스러울 때 마다 상소를 올려서 조정의 실정을 지적하고 군왕의 자질과 통치철학의 원리를 제시했습니다. 남명은 평생 여러 번의 상소를 올렸지만, 그 중에서 전문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정묘사직정승정원장」, 「무진봉사(戊辰封事)」, 「사선사식물소(謝宣賜食物疏)」 네 편이 있는데 이 네 편중에 특히 명종 10년(1555)에 올린 「을묘사직소」는 정권의 실세 중 실세인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향한 돌직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그 내용 일부를 보자면,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으며, 인심도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먹혀 진액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물에 끌어들이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의 재물을 벗기기를 이리(狼)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는데도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
 대비(大妃 ; 문정왕후)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

 지엄하고 지엄한 대비를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임금을 고아에 지나지 않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입바른 소리입니까?
 이 상소문으로 그는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 갔지만 다행히 그를 벌하면 언로가 막힌다는 사림의 지원 덕분에 참형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언로가 자유로운 오늘날에 보드라도 참으로 섬뜩한 돌직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성현감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문 전문 비-

 

 남명의 이와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로 이어져 남명이 죽은 지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자들은 구국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영남의 3대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포함한 의병장급 인물이 무려 5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한 사람의 정신적 유산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수신(修身)하면 치국(治國)의 길로 향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겼던 시대에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자신을 경책하고 후학들을 기르는데 힘썼습니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할 말은 언제 어디서나 기꺼이 하는 선비의 일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남명의 이 같은 정신을 대하면서 나는 요즘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청문회에 오르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대통령의 장관직후보 지명을 통보 받고 후보직을 사양하면서 “비록 대통령께서는 국민의 투표로 당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비명에 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나이 많은 노인네들의 연민 덕분이며 본인의 당체는 시집 못간 노처녀에 불과할 뿐으로 .....”하는 이런 상소문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과 부를 탐하느라고 생긴 온갖 치부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장관이 되겠노라’ 혹은 ‘국무총리가 되겠노라’는 사람들, 그리고 청문회서 낙마하자 ‘마녀사냥이다’, 혹은 ‘운이 없다’며 그 책임을 자신보다 남 또는 시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
  이런 사람들에게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한 다음에 치국(治國)을 생각해보라며 허리춤에 남명의 성성자(惺惺子) 방울을 하나 달아줬으면 싶네요. 

 

 

 

-삼가면 외토리에 있는 450년 고목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사람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듯,

한 사람의 정신이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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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신령 2014.11.11 0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성이 대단하시고
    문장도 훌륭하여
    많이 배웁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