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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8 과부와 고아의 정치, 그리고 남명의 선비정신 (1)

 지난 9월23일 한국컨텐츠진흥원,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하는 ‘경남 이야기’의 블로거 탐방대의 일원으로 합천을 찾았습니다.
 합천군 삼가는 남명이 태어난 곳으로 남명이 일생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고장입니다.
 그럼에도 환갑이 넘은 노년에 일생을 마감하고자 지리산 아래 산청군 덕천에 가서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지냈던 인연으로 마치 산청군이 남명의 출신지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그러한 배경에는 산청군에서는 산청군을 ‘선비의 고장’이라며 그 중심인물로 남명을 내세우면서 유적지와 기념관을 건립하여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는데 비하여 합천군은 지금까지 이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뇌룡정-

-용암서원-

-남명 생가-


 그러다 최근에 와서 인문학이 강조되고 그 연장선에서 우리나라의 선비정신과 남명 사상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합천군에서도 남명의 문화적 가치와 유적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관광사업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날 우리는 뇌룡정 - 용암서원 - 남명생가를 둘러보았는데 남명 조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가 아니고, ‘사람은 죽어서 정신을 남긴다’는 생각 말입니다.

 

 조선시대 사림의 ‘영남학파의 양대산맥’하면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입니다.
 퇴계이황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정치무대에서 점진적인 개혁으로 훈구파를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사림의 선비들의 입지를 만들어 주었다면 남명조식은 재야에서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행하여야 할 진정한 덕목이 무엇인가를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입니다.

 남명은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선비가 굳이 중앙정부의 관료가 되어야만 국가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이를 모두 사양하였습니다.
 대신에 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진력하였습니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신조로 삼았으며, 그가 노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리산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는 왼쪽 창문에 ‘경’ 자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 ‘의’ 자를 써 붙이고, 또한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 칼에는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고 하는 글귀를  새겼다고 합니다.

 ‘경’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수양하는 것이라면, ‘의’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이룩하려는 것으로, 그는 서푼어치 지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대신 깊은 학문탐구와 사유로 흔들림이 없는 단단한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직설을 하여 정의를 세우고 민본국가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남명은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안위가 걱정스러울 때 마다 상소를 올려서 조정의 실정을 지적하고 군왕의 자질과 통치철학의 원리를 제시했습니다. 남명은 평생 여러 번의 상소를 올렸지만, 그 중에서 전문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정묘사직정승정원장」, 「무진봉사(戊辰封事)」, 「사선사식물소(謝宣賜食物疏)」 네 편이 있는데 이 네 편중에 특히 명종 10년(1555)에 올린 「을묘사직소」는 정권의 실세 중 실세인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향한 돌직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그 내용 일부를 보자면,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으며, 인심도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먹혀 진액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물에 끌어들이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의 재물을 벗기기를 이리(狼)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는데도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
 대비(大妃 ; 문정왕후)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

 지엄하고 지엄한 대비를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임금을 고아에 지나지 않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입바른 소리입니까?
 이 상소문으로 그는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 갔지만 다행히 그를 벌하면 언로가 막힌다는 사림의 지원 덕분에 참형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언로가 자유로운 오늘날에 보드라도 참으로 섬뜩한 돌직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성현감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문 전문 비-

 

 남명의 이와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로 이어져 남명이 죽은 지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자들은 구국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영남의 3대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포함한 의병장급 인물이 무려 5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한 사람의 정신적 유산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수신(修身)하면 치국(治國)의 길로 향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겼던 시대에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자신을 경책하고 후학들을 기르는데 힘썼습니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할 말은 언제 어디서나 기꺼이 하는 선비의 일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남명의 이 같은 정신을 대하면서 나는 요즘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청문회에 오르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대통령의 장관직후보 지명을 통보 받고 후보직을 사양하면서 “비록 대통령께서는 국민의 투표로 당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비명에 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나이 많은 노인네들의 연민 덕분이며 본인의 당체는 시집 못간 노처녀에 불과할 뿐으로 .....”하는 이런 상소문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과 부를 탐하느라고 생긴 온갖 치부에도 불구하고 염치없이 ‘장관이 되겠노라’ 혹은 ‘국무총리가 되겠노라’는 사람들, 그리고 청문회서 낙마하자 ‘마녀사냥이다’, 혹은 ‘운이 없다’며 그 책임을 자신보다 남 또는 시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
  이런 사람들에게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한 다음에 치국(治國)을 생각해보라며 허리춤에 남명의 성성자(惺惺子) 방울을 하나 달아줬으면 싶네요. 

 

 

 

-삼가면 외토리에 있는 450년 고목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사람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듯,

한 사람의 정신이 후대 사람들에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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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신령 2014.11.11 0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성이 대단하시고
    문장도 훌륭하여
    많이 배웁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