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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5 딸과 둘이 자유여행 - 이스탄불에서 날치기와 페에스북 (6)

 대개의 서민들이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 유럽여행은 일생일대의 꿈이었지만 막상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 딸이 항공사에서 지금까지의 마일리지를 금년 내로 사용하지 않으면 무효로 한다며 아빠엄마가 마일리지를 사용하지 않을 것 같으면 지가 그것을 가지고 유럽여행을 했으면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에 큰마음 먹고 딸과 둘이서 터키(이스탄불, 카파도키아) - 헝가리(부다페스트) - 오스트리아(빈, 짤츠부르크) - 독일(뮌헨, 로텐부르크) - 스위스(루체른) - 체코(프라하) - 독일(프랑크푸르트) 코스의 16박 17일의 자유여행을 떠났습니다.

 

 각 나라마다, 도시마다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가는 곳마다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 터키에서의 추억과 인상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유럽사회가 오래 전부터 개방된 사회로 이민족이 섞여 사는 것쯤은 알고 있고 또 그런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이 현지인이고 어떤 사람이 관광객인가 하는 것쯤은 대충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도저히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 세계 각처로부터 워낙 많은 관광객이 올 뿐만 아니라, 터키민족은 본래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한 튀르크계 민족으로(중국에서는 한문으로‘튀르크’를 ‘돌궐’이라 표기) 이들은 중앙아시아 동남부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많은 이민족과 교합을 하였습니다.
 또한 이스탄불의 지리적 위치가 아시아, 유럽, 아랍, 아프리카의 교차점에 있어 세계의 무역상들이 이 도시를 드나들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이민족들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어 그 생김새가 러시아, 아랍, 동양인,서양인, 흑인, 또는 혼혈 등응 그야말로 천태만상이기 때문입니다.

 

 

-5~6백미터 남짓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동양의 끝과 끝이 접하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딸과 내가 각각 당한 날치기 사건입니다.
 터키에 먼저 간 딸이 이스탄불공항에서 나를 기다리느라 공항카트에 짐을 얹어 놓고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날치기꾼이 손가방을 날치기해 갔는데 다행히 그 모습을 본 현지인 청년이 일러주어 달려가 손가방을 찾았습니다.
 두 번째는 붐비는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중에 내가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했습니다. 이튿날 현지 경찰이 내 페이스북 댓글란에 영어로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댓글을 남겨 한국에서 이를 본 친구 홍상철 한의원 원장이 연락을 하여 경찰서에 가서 핸드폰을 찾았습니다.    

 

-페이스북에 터키경찰이 올린 댓글 덕분에 스마트폰을 찾았습니다. 페북의 친구들 덕분에 . . - 


 소매치기와 거지가 수두룩하면서도 이방인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들이 터키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길을 물으면 잘 모르면 모른다하고 그치는데 그들은 자기가 모르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스마트폰 검색을 해서라도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인정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 비잔틴제국 1,000년과 오스만제국 500년의 역사,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를 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도시로 그 역사적 배경을 내 나름 대충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BC 8세기 무렵부터 로마에서 시작된 로마제국은 AD 395년 동·서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했던 서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476년에 멸망하고,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AD 306~337)는 보스포루스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이라 불리게 되었고,
 비잔틴제국이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 :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의해 점령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로 바뀐다.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은 16세기에 아시아·유럽·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편으로 참전하였다 패전하여 오스만제정 시대가 막을 내리고 1923년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 수도를 앙카라로 하였다.

 

 이스탄불의 여러 유적지 중에서도 이러한 터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이 하기아소피아다.
 하기아소피아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 후 재건을 결정하여 5년 11개월 공사를 하여 537년 12월 27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메나스 총대주교에 의한 헌당식이 거행됐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사당으로서 이용되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며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이슬람사원)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타일로 모자이크한 성화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메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첨탑이 증축되어 교회 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아야 소피아 자미로 불리게 된 이 정교회 대성당은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기독교 성당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아야소피아박물관 - 

 

 

 

 

 

 

- 이슬람의 문양을 한 회칠을 벗겨내자 화려한 타일로 모자이크한 기독교 그림이 나타납니다 - 

 

 

 

-별관에는 역대 술탄과 가족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로마제국은 본래 태양신을 비롯한 다신교이면서 기독교를 탄압하였는데 콘스타니누스황제는 태양신을 믿으면서 기독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제국, 그리고 아야소피아 성당에 엄청난 정성을 들여 모자이크한 예수의 그림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성당으로 지어진 건물이 가장 권위 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활용되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아야소피아 박물관 맞은 편에 있는 술탄 아흐메드 자미(블루 모스크)

앞의 아야소피아가 비잔틴 제국에 의해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지어진데 반해 이 건물은 오스만제국에 의해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전자가 금빛 타일로 치장된 반면 이 건물은 청색 타일로 치장된 점이 특이하고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이 기도를 하고 이들은 들어가기 전 밖에서 발을 씻고 들어갑니다.

 

 

 

 

 

 

 

 

 

 

슐레마니에 모스크

 

 

  블루 모스크가 가장 아름답다면 슐레마니에 모스크는 가장 규모가 큰 모스크입니다.

 오스만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건축물로 지금까지 지진에 다른 건물들은 손상을 입기도 하였지만 이 모스크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건축가로 하도 유명하여 미켈란젤로가 그의 건물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애원할 정도였으며, 이웃 나라 왕들도 집을 지어달라고 하였으나 일체 응하지 않고 오직 하나 제자에게 물려 준 도면 하나가 인도의 타지마할묘라고 하는데 타지마할은 제자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성곽 외부에는 그를 기념하는 작은 비가 있습니다.

 

 

 

 

 

 

 

 -복원공사 조감도인데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톱카프 궁전입니다

 

 건축물로 본다면모스크에 비하여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내부에 전시된 왕가의 일용품들이 볼만 한데 촤영이 금지된 관계로 눈에만 담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건축쟁이 내한테는 방마다 곳곳에 장치되어 있는 수납공간과 당시의 기술로 각 방에 상수도 배관 기술이 있었던 점이 특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 문을 통과하고.. 

둘째 문을 통과하고

-세째문을 통과허면 ..

 

-비로소 왕실의 본 모습이...

 

 

 

 -여인네들이 거주하는 공간에는 거세를 당한 흑인만 출입이 가능..

 

 -공주의 방에 있는 세면대인데 각 방에 이런 세면시설이 거의 다 있는 편.

 -벽에 설치한 수납공간-

 

 

-외부 테라스에 설치된 배수로인데 이렇게 치장을 ...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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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잉 2014.11.05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olis라고도 쓰나요?

  2. 미마르 시난 2014.11.05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마르 시난을 기념하는 비석이 타지마할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들어보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할튼 6년 동안의 부실 공사로 지어진 아야 소피아보다는 술레마니예 모스크가 훨씬더 기술적인 측면에서 훌륭하다는 얘기를 일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사진으로 보니깐 굉장히 멋지네요

  3. 실비단안개 2014.11.06 1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부럽~^^

  4. 블로그앤미 2014.11.07 1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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