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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4.10 광저우 육조사에서 여래를 보다. (1)

  함안 군북면 하림리에 있는 서산사의 원담스님께서 중국 광저우 육조사에 간다고 동행하자고 강권을 하여 320일부터 24일까지 45일간 다녀왔습니다.

  2012년 거창 가북면에 있는 용암선원에서 석달간의 동안거 이후로 나는 꾸준히 참나(眞我)를 찾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고로 석가모니 이후로 마음세계를 가장 잘 설파한 육조스님의 흔적을 스님들과 함께 구경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마음을 내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육조혜능(六祖惠能) 대사하면 인도에서 28대 조사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 동양 1대 조사가 된 후로부터 6번째 조사로 불가에서 교과서인 육조단경이 대사의 어록입니다.

  대사는 일자무식으로 나무장사를 했는데 하루는 객점에 나무를 져다주고 문 밖을 나오는 순간에 한 손님이 마땅히 머무름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열려 깨닫고는 오조홍인(五祖弘忍)대사를 찾아가 탁마를 하여 법을 이어 받았습니다.

  흔히 불교의 선가에서는 오직 선()수행을 통해서만 정()에 들 수 있으며, 정에 들어서야 비로소 해탈을 한다고 하는데 육조스님이 깨달은 경위와 법 설한 바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은 자기 마음이 곧 부처요 불법이며, 자기 마음을 알면 곧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설한 법문을 보면 불가사의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설산에서 6년 고행 끝에 깨닫고 삼칠일(21일간)을 고심하고 고심하다가 깨달은 경지를 입으로 말하는 것이 차라리 열반에 드는 것 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 경지는 신비하고 오묘하여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해서 불법의 진리는 하나지만 사람 사람마다 근기에 따라 깨닫기 쉽도록 팔만사천가지로 법을 펼쳐 보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된 스님네들은 평생토록 경전을 읽고 외웁니다만 대부분의 스님들이 골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중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육조스님은 글자를 모르므로 경전을 읽은 바도 없고 나무꾼과 사냥꾼 노릇만 하였기에 다른 승려들처럼 경전을 들을 기회도 없었지만 한 순간 자기마음(自心)을 깨닫고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육조스님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많은 승려들이 자신들이 공부한 경전에 대해 그 뜻을 물을 때면 스님은 묻는 이에게 자신은 글을 모르니 경전을 읽어보라고 합니다. 그러곤 답을 하는데 그 답은 실로 글 모르는 무식꾼이 뱉는 말과는 천리만리나 떨어져 있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법을 설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섭에게 법을 전하면서 불법은 이심전심의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육조혜능대사에게 딱 어울리는 말인 것 같습니다.

  서쪽 인도의 석가모니 마음이 동쪽 중국의 육조혜능선사에게 맞닿았다고 할까요.

 

 

 

 그럼 320일부터 324일까지 45일의 육조사 기행을 보겠습니다.

 

  첫날 육조사 대원(大願) 방장스님을 방문합니다.

  방장스님의 표정을 유심히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눈동자와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이 잔잔한 미소만  흐르는 그 모습에 누구나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적어도 도를 닦는 스님이라면 저 정도는 되야지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나게 합니다.

 

 

 

 

 

대원 방장스님이십니다.

 이 분의 모습만 보고 있어도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지고 환희심이 생겨나는데 나만 그런가 했는데 동행한 이들 모두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육조사에서 운영하는 호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중국의 절에서는 호텔, 식당, 오락실, 야외수영장 등 돈 되는 속가의 사업을 다 합니다. 우리 일행은 이틀간 이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이틀간의 숙박과 식사, 그리고 가사, 장삼을 포함한 다소의 선물을 육조사에서 지원한다고 하네요.  

 

식당의 규모에 입이 벌어집니다.

 

야외수영장인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 휴업 중이네요.

 

비가 많이 내리는 기후 때문에 호텔에서 식당까지 가는 길은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남은 빵이나 만두를 연못에 던지자 잉어와 메기가 몰려 듭니다.

 

진흜 속에서 핀 연꽃이 아름답듯

고달픈 삶 속에서도 웃음을 피워내는 서민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호텔의 청소부들이지 싶은데 점심도시락을 먹고 자투리 시간에 나름의 낙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육조사를 방문한 스님네들이 남긴 작품 전시장이 있는데 동행한 스님들네들도.....

 

   내게 육조사 동행을 권한 원담스님과 인터넷 불교방송을 하는 거목스님의 달마상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달마를 그려도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닮은 달마상을 그린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자화상인 셈이죠. ㅎㅎㅎ

 

 

 

 

 

 

 

 

 

 

 

  컵을 들고 계신 분이 나와 나흘간 룸메이트를 한 도경스님인데 몇번의 큰 사고로 정신이 깜박깜박하여 한국에서 갖은 심혈을 기울여 미리 글을 쓰서 방장스님께 선물 했는데 방장스님이 그 정성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정성이 깃들인 선물이라며 특별히 감사의 답례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는 ?????

 여기서도 이심전심은 통했는가 봅니다. ㅎㅎㅎ

 

 

 새로이 불사를 하고 있는 스님들께 방장스님이 선물한 현판글체입니다.

 절이 완공되면 이 글체가 현판으로 떡하니  붙겠죠...

 

 

 

 

 

  이틑날 오후 부처님의 법을 전한다는 전법계를 받습니다.

  예로부터 불가에서 전법계를 전하는 증표료 가사장삼과 발우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날 대원 방장스님이 손수 가사장삼을 입혀주었는데 의복의 문양과 색상에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 같은 속가의 사람은 밤색입니다. 

 

 

 

 

 

 

 

 

 

 

 

 

사흘째 육조스님이 처음 삭발한 머리카락을 보관한 탑이 있는 광효사를 방문합니다...

 

 

 

 

이 건물의 지붕 모양은 중국의 여느 건물과는 달리 우리나라 전통한옥의 지붕모양인 점이 특이합니다.

 

바깥 담장에는 한문의 글귀가 쭈욱 있는데 아마도 육조스님의 법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은 대불사라는 절인데 광저우 시내에서도 땅값이 가장  비싼지역에 떡하니 불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절들이 모두 산중에 있는데 비해 중국의 절들은 시가지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제자 오백나한의 상을 모신 화림선사(華林禪寺)입니다.

  오백의 나한 상이 그양말로 천차만별입니다.

 

 

 

 

 

 

 

 

 

머리에 염색을 한 젊은이가 정성스례 에배를 올립니다.

중국에서는 이같이 젊은 불교신자가 많다는 점도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절 뒷문으로 나오니 온갖 옥이 다 모인 시장이 있습니다. 그 규모가 정말 대단합니다.

 

 

 육조사에서는 육조단경을 12개국어로 번역하여 방문객에게 선물로 주는데 이날 인솔자가 방장스님께 내가 육조단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소개를 하자 방장스님은 특별히 자필로 돈오성불(담박 깨달아 부처를 이루다)이라 적고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는 한국에서 가져간 육조단경 책을 가이드한테 선물했더니 매우 좋아라 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4박5일간 우리를 성심으로 안내해준 가이드 젊은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행기간 동안 내가 깨달은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여행 사흘째 밤에 스님과 스님을 공양하는 보살님 두 분, 그리고 나 셋이서 가볍게 곡차를 한 잔 했습니다. 그 자리서 노보살님께서 이번 여행 동안에 스님들한테서 못 볼 것을 많이 봤다고 하자 스님께서는 나쁜 모습은 마음에 담지를 말고 못 본 것으로 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보살님은 어찌 눈에 보이는데 못 본 것으로 할 수 있냐며 한참을 논쟁하는 가운데 나는 문득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본다.’라는 경구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스님의 모습선생님의 모습, 부모의 모습 등등에 대하여 어떤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상에서 벗어나면 그 사람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상은 상대방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입니다. 자기가 만든 상 안에 상대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상대를 부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우리가 역설적으로 너는 자신을 버리고 상대방이 만들어 놓은 상에 너를 맞출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라도 불가하다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가 자기 본래의 진면목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본래의 진면목은 보지 못하고 자신의 선입견에 가려진 상을 보고 그 상이 상대방의 진짜 모습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목마르면 물을 찾고 배고프면 밥을 찾는 사람의 마음,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오해도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밥이나 먹자!!!!

Posted by 땡삐 선비(sun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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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8.12.30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혜능대사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