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창군 가북면 용암리의 용암선원에 온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디를 가나 처음 대하는 곳은 모두가 낯설고, 생면부지의 면을 트자면 시간이 다소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금년 겨울 이곳에서 나는 잦은 눈 덕분에 의외로 쉽게 동네 사람들과 면을 트고 노인정에도 심심찮게 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골이나 그렇듯이 이 마을에서도 70대 노인은 젊은 축에 들고, 가북면을 운행하는 버스에서 70대 노인은 80~90대 노인에게 밀려서 좌석도 양보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런 노인들만 살다보니 눈이 내리면 눈을 치울 사람이 별로 없으므로 자연스레 젊은 내가 앞장서야 하고, 눈 좀 치우고 나면 할머니들은 노인정에서 커피를 끓이거나 찌짐을 부쳐 한사코 먹고 가라합니다.
바로 그때마다 보는 장면이 노인네들의 화투놀이 도박입니다.
고스톱도 아니고 육백도 아닌 민화투라고 하는 것인데 나도 어릴 적에 한 기억이 있는데 점수 계산은 어떻게 하는지 기억이 아리송송....
아무튼 노인네들은 이 민화투로 하루종일 십원짜리 동전내기 노름을 합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 십원짜리 동전을 개인 주머니에서 내는 것이 아니고 항상 노인정에 있는 공금을 얼마씩 갈라서 내기를 하고 끝나면 다시 그대로 들여 놓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노름밑천으로 공금유용을 하는 셈이죠.ㅎㅎㅎ
-노인정의 이모저모 모습입니다.
사람 냄새, 따신 온기가 느껴지지요.
그런데 지금 노인네들이 하는 노름이야 말 그대로 놀이 삼아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진짜 노름이 심했다고 하네요.
그 까닭인즉 가을 농사가 끝나고 나면 동지섣달 산골의 나날은 무료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시간 죽이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술과 노름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노인네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용암마을이 용암리 여러마을 중에서도 가장 큰 마을로 예전에는 90호가 넘게 살았고, 마을 하천가에는 물방앗간이 두 개나 있었고 길가에는 주막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을회관자리에는 본래 학교가 있었는데 1941년도에 송정마을로 이사를 갔으며, 이 동네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았던 이유는 가북면 산골짜기 중에서 유달리 기온이 따뜻하여 보리농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묵혀서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곳들이 전부 전답이었고, 지금의 동네 안 채전밭은 모두 집터였다고 합니다.
몇몇 노인네들은 과거 개금마을은 춥고 먹을 것이 없는 그야말로 살기 어려운 동네였는데 지금은 차츰 살기가 좋아져 가고 사람도 늘어나고 있는데 옛날에 잘 나가가던 이 동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못내 아쉬움을 토로하였습니다.
-쓰러져가는 방앗간과 늘어나는 빈집을 대신하여 늘어나는 산소가 이 동네의 역사를 이어가겠죠?
-마을의 빈집들입니다. 아마도 사는 집보다 빈집이 더 많을 듯 합니다.
-마을 옆 산능선에 있는 묘지들입니다. 자꾸만 늘어나겠죠?
세상의 변화는 이런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농작물이라 하면 쌀과 보리가 아니면 농작물로 취급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당연히 쌀.보리 농사가 잘되는 농토를 상답이라 하였고, 집도 단열기술이 없으므로 바깥 기온이 낮으면 얼어 죽기 십상이니 당연히 따뜻한 양지를 찾아 집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쌀.보리 대신에 특용작물이 대세이고, 집도 단열과 구조적 측면에서 자연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여 굳이 양지만 찾을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지금으로선 경사가 급한 용암마을보다는 완만한 개금마을이 더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변하는 이치야 그렇다 손 치더라도 속절없이 쇠락해가는 농촌마을들 이모저모들과 노인네들 손 마디마디의 굳은살을 바라보노라니 왠지 가슴이 짠합니다.
-아래 빈집을 보노라니 추사의 세한도가 자꾸만 생각이 나네요.
뻥 뚫린 저 구멍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허무 ~ ~
“가을 농사 끝나고 11월부터 내년 7월까지는 돈맛 볼 끈덕지가 없으니 농촌에서 뼈 빠지게 한 철 열심히 벌어본들 맨 날 제자리걸음이다.”며 소주잔을 들이키던 젊지도 늙지도 않은 한 주민의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11월부터 7월까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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