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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처가 씨암탉과 창녕성씨고택이 살아남은 이유

선비(sunbee) 2016. 7. 26. 13:49

전국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고택들이 있습니다. 이런 고택들 중에는 간혹 종손들이 지금까지 살림을 살고 있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 지자체 또는 문중에서 소극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몰골이 마치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노인네 같이 쇠잔하여 보고 있노라면 맘이 짠해집니다.

하지만 창녕성씨 고택은 판이하게 다른데 그 배경에는 노스페이스로 유명한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의 숨은 노력과 조상들의 애민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들도 6.25때 미군 24사단이 사령부로 사용하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하면서 문서를 태우다 건물까지 상당부분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1998년 성기학 회장의 노모가 창녕 옛집에 가고 싶다고 하여 왔는데 집이 너무 낡아서 복원을 하기 시작하여 지금도 공사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현재 성원무역에서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여 현재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창녕성씨 고택과 양파시배지 표석

 

사람이 살고 있음을 빨래줄의 빨래와

아궁이 불을 땐  흔적이 말해 준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3대 부자 없고 3대 거지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일제시대와 6.25동란이라는 엄청난 난리와 세계 최고속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왕조가 무너지고, 양반사회가 무너지고, 농경사회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는 과정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또는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대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총살을 당하기도 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명문가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6.25때 빨갱이 노릇을 한 사람이 있는 집안사람들은 함께 빨갱이로 몰려 공직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여권 발급, 취업, 등등에서 연좌제 그물망에 걸려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유경은 일본 외국어전문학교를 다녔지만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신간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제 말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며 고향에 첫째 부인과 세 딸이 있었지만, 뜻을 같이하던 김원주를 맞아 아들 일기와 딸 혜랑과 혜림을 두었습니다.

 유경은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내다 1948년 월북하였고 그 아내 김원주도 같은 해 남북정치협상 당시 여맹 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가 월북하였고, 아들 성일기는 유격대원이 되어 남도부 빨치산 참모장으로 활약하다 전쟁이 끝난 뒤 창녕 당숙집에 숨어 지내다 1953년 국군 특무대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막내 딸 혜림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낳았으니 창녕성씨 집안은 그야말로 빨갱이 중에서도 빨갱이집안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창녕성씨 집에 발을 내딛는 자체가 빨갱이임을 자처하는 셈이니 감히 뉘라서 고향집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기학 회장이 1998년 노모의 뜻에 따라 창녕고향집을 뒤늦게 찾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성씨 집안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창녕성씨 계보.

구연정은 찬영의 장남 낙문 장손 윤경에  이어지고

아석헌은 낙교가 자식이 없어 낙문의 차남 유경을 입양함으로서 유경에게 이어짐. 

 성기학 회장과 김정일을 촌수로 따지자면 6촌 처남남매지간임.

 

 성혜림은 김정일에게 첫사랑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장남 김정남을 낳았지만

 김정일은 권력승계과정에 책 잡힐까 봐 아버지 김일성과 주변에 비밀에 부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5년 성규호가 이 집을 최초로 지은 이후 위와 같은 역사의 격랑을 넘으면서도 오늘에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음은 이 집안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규호는 스스로를 돌로 낮추어 아호를 아석(我石)이라 하였고 1863년 병자년 기근 때에는 곡간을 열어 이웃에 양식을 나누어 주었고, 그의 손자 낙안과 낙성, 증손 재경도 조부의 뜻을 좇아 호를 석민, 석운, 우석이라 하여 같은 길을 걸었는데, 손자 낙안과 낙성은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를 개설 후학을 가르치고 부녀자까지 교육하다가 일제 때 철거되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대지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1953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파씨를 가져와 농가에 보급하였습니다.

증손 재경은 양파 채종과 재배기술을 확보하여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경화회라는 농민회를 조직 양파를 특작물로 농가소득을 올렸으며, 1942년 춘궁기에는 면민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였고, 1981년 그가 사망 시에는 그가 운영하던 협성농산 주식을 경화회 조합원들에게 대부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기학 회장은 경화회 회관을 새로 지어 군민에게 기부하였으며, 창녕성씨 고택을 학회나 세미나 장소로 빌려주기도 하고 창녕군민을 위하여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강좌를 여는 등으로 창녕성씨 고택이 한 문중의 집이 아닌 창녕의 문화센터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로 낮춘 성규호의 아석헌과 석운재

 

 

근면함을 공경한다는 경근당

 

 

구연정

  

  

지금 노스페이스로 잘 나간다는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사업을 해왔는지 잘 모르지만 짐작컨대 앞서 언급한 집안의 내력 때문에 엄청난 고초가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대의 선행과 후광이 없었다면 김정일의 처갓집 성씨가문은 여느 가문과 마찬가지로 50~60년대 이데올로기의 광풍 속에서 멸문지화를 당하여 오늘에 사람도 집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창녕성씨고택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태백산백, 한강의 스토리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발길에 차이는 돌과 같이 낮추고 근면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살다간 흔적, 그 속에서 오늘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최근 저녁 9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롯데그룹 형제간의 다툼이나 삼성가의 온갖 술수의 탈세와 불법증여 행태 등등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베풀기에 인색함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에 내는 세금도 어떡해서든지 빼먹으려 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할 만한 빵집에다 치킨집에다 오뎅 국수까지 모조리 싹쓸이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삼성가나 롯데가, 한진가 등등의 재벌 중 누군가가 양파 채종과 재배술을 남 먼저 익혔다면 그들은 어떡해서든지 무슨 특허, 무슨 특허하며 양파시장을 독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창녕성씨고택을 둘러보고 인간 누구나가 탐하는 재물이라는 것, 권력이라는 것의 가치는 무릇 이 집 사람들의 생각과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남북이 통일되었다면 김정일이 처갓집 창녕성씨 고택에서 씨암탉 한 마리쯤은 잡아 먹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등등을 하면서 우리네 삶과 내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