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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치도 무진장, 즐거움도 무진장한 함안의 무진정.

선비(sunbee) 2016. 8. 3. 08:00

 

우리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두고 그 사람 돈 무진장하다라고 하고 물이 엄청 깊을 때 물이 무진장 깊다라고 하는 등으로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경지를 두고 '무진장(無盡藏)‘이라 합니다.

그런데 경치도 무진장이요 주인의 즐거움도 무진장한 정자가 있었으니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4-2번지에 있는 무진정인데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른다고 일명 이수정이라고도 불립니다.

 

인터넷에서 무진정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조삼선생(1473 ~ ?)이 직접 지었다는 설과 후손들이 조삼의 공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전자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조선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사림학자 신재(愼齋) 주세붕(1495~ 1554)이 지은 기문(記文)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기문의 일부를 옮기자면...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 사람, 만 사람이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 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중략)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동인데 선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장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중략)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 일찌감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曾點)의 영기귀(詠而歸)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詩興)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무진정 앞 연못.

과거에는 내가 흘렀으나 지금은 길이 생기고 주변이 변하면서 연못을 조성.

 

나무에 선 사람의 덩치를 보면 나무의 크기를 짐작... 

                                                                   연못에 떨어진 백일홍 꽃잎과 물풀의 조화가....

           

 

 

당시 선생은 아주 높인 말이었는데 주세붕이 이 기문에서 열네 번이나 선생이라 호칭을 쓰면서 조삼에 대해 지극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조삼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며, 무슨 까닭으로 존경을 받았을까요? 그 까닭에 대해 나는 아래 세 대목으로 짐작해 봅니다.

 

1. 수험준비생이 면접관을 탄핵하는 배짱

조삼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의 손자로 글공부를 좋아하여 1489(성종20) 17세에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곧이어 즉위한 연산군이 폭정을 하자 문과를 단념하고 학문에 힘쓰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중종이 즉위하자 바로 성균관에 입학해 학문에 힘씁니다.

이 때 사림을 도륙 낸 주범이며 연산군 폭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이 중종반정 이후에도 계속 권자에 있자 울분을 참지 못해 조삼이 성균관 유생의 연명을 받아 유자광을 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중종 2(1507) 그해 조삼은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장면이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조삼은 시험공부를 하는 수험준비생 신분이고 유자광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험생 면접을 보는 면접관이 될 수도 있는 실세 중의 실세의 신분에 있었습니다.

수험준비생이 곧 있을 시험의 면접관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탄핵하는 연판장을 돌린다? ? ?

간이 붓지 않고서야 감히 .....

 

동정문(動靜門)

움직이는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문을 들어서면....

         

2. 권력, 권한을 나누는 무욕의 정신세계

조삼은 공직에 나아가서는 사헌부 지평· 집의 등 내직과 함양군수, 성주· 상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인정받아 중종으로부터 상품을 하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노년에 들어 공주목사, 안동부사를 역임하면서는 자질구레한 일은 하급관리들에게 맡기고 유유자적하게 정치를 하다 언관으로부터 게으르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경우를 두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언관의 지적대로 백성들의 삶 구석구석을 열심히 살피지 않고 대충대충 게으른 정치를 했다고 질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 생각해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손에 들어온 권력 내지 권한을 남과 나누기를 싫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직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권한이 아닌 남의 일에 월권까지 해가면서 권한을 확대하려는 이가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조삼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이나 권한마저도 하급관리들에게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게 말은 쉽지만 권력과 재물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물건이기에 마음을 내려놓는 무욕의 정신세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진정 누루에 올라

창을 열고 사방을 둘러보니 조물주의 무진장 세계가 한 눈에....

3. 세상을 내다보는 명철한 안목과 실천의 용기

조삼이 공직에 머물던 시대는 중종반정으로 비록 폭군 연산군이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중종, 인종, 명종을 가운데 두고 훈구파와 사림파, 대윤과 소윤의 권력다툼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나라의 봉록을 얻어먹는 관직의 수는 한정돼 있고 나라에서 충신들에게 지급하는 녹전도 한정되어 있으니 훈구파 세력이 커지면 사림파 몫이 작아지고 사림파 세력이 커지면 훈구파 몫이 작아지므로 목숨을 건 대립이 지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난세를 감지한 조삼은 벼슬을 뿌리치고 낙향하여 후진양성과 여생을 보내기 위해 무진정을 지었습니다. 조삼이 낙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사화에 희생된 사람 중에는 아무런 죄도 없이 무고하게 죽어간 이도 있을 것이고, 또 개중에는 조삼보다 학문이나 정치술이 뛰어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삼이 우러러보이는 이유는 비명에 간 그들이 권력 또는 벼슬자리에 매몰되어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벼슬자리를 떨치고 유유자적 행동할 수 있었던 점입니다.

 

취업할 수 직장이 다양한 오늘날에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관직 말고는 취업자리라고는 없는 당시로서는 관직의 포기는 곧 백수의 길이기에 아무나 결단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관직이라는 것은 생계수단일 뿐만 아니라 돈을 주고 사서라도 하고 싶은 명예와 권력이 있는 직업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 온갖 짓 다해 가며 금배지 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어디 먹을 것이 모자라, 입을 것이 모자라 그렇게 안달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명예와 권력입니다.

남들이 이처럼 가지고 싶은 명예와 권력, 그리고 직장까지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용기가 과연 내게 있는가하고 스스로 자문해봅니다.

 

 

굽이굽이  흘러온 우리네 역사를 넘보기라도 하듯 무진정 담을 넘는 소나무

 

무진장의 세계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진정의 경치와 바람을 맞으며 한담을 나누는 사람들.

 

 주세붕의 기문 중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삼도(三島)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十州)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며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명퇴든 은퇴든 퇴직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한 분이라면 함안의 무진정에 가서 명예, 권력, 재물에 대한 욕심 다 내려놓고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도 않은 조물주의 무진장 세계를 한 번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