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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이야기

배내골에서 세 번째 만난 카튜사 사랑.

선비(sunbee) 2013. 9. 30. 11:12

배내골에서 세 번째 만난 카튜사 사랑.


 요 며칠간 공무원들을 상대로 대화를 하다가 보니 30년도 넘은 옛일이 생각나서 내가 당시에 읽고 충격을 받았던 ‘부활’책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너무나도 유명한 고전이므로 대부분 그 내용을 알고 있겠지만 내 나름 그 줄거리를 대략 요약해 보겠습니다.

 

 카튜사 바슬로바는 농노인 어머니와 떠돌이 집시 아버지 사이에서 여섯 번째 사생아로 태어나 여지주 집에서 반은 하녀처럼 반은 양딸처럼 자랐습니다.
 16살이 되던 해에 지주의 조카인 네홀류도프가 고모집을 방문하였다가 카튜사를 유혹하여 사랑의 불장난을 하고 돈을 주고 떠납니다. 그 뒤 카튜사는 아이를 낳고 이것이 죄가 되어 주인집에서 쫓겨나 온갖 궂은일을 하며 전전하다가 매춘의 길에 들어가 살인사건에 휘말립니다.
 네홀류도프는  우연히 지방재판소의 배심으로 참석했다가 카튜사의 재판과정에 관여하게 됩니다.
 여기서 배심원들은 카튜사가 죽은 사내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사내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자 한 행위였고, 돈을 훔치지 않았고, 돈을 훔치지 않았으므로 죽일 의도도 없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런데 유.무죄를 묻는 법원 질문서에 답변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유죄임. 단, 살해할 의도는 없었음.”이라고 할 것을 “유죄임. 단, 절도할 의사는 없었음.”이라고 답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 맙니다.
 답변서를 받은 재판장과 판사는 배심원의 이 같은 답변서가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알았음에도 각자 자신들의 사소한 볼 일 때문에(재판장은 내연녀를 만나는 약속 때문에, 등등) 이를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선고해버리고 카튜사는 시베리아로 유배의 길에 오르고 네홀류도프도 그 길에 동행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게 됩니다.

 

 

 

 

 위와 같은 줄거리의 똑 같은 책을 읽고도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느끼는 바가 사뭇 다르기에 내가 느낀 바를 한 번 적어봅니다.
  
 내가 부활을 처음 접한 때는 고등학교 때이고 그때 느낀 소감은 선남선녀의 섣부른 사랑으로 얼마만큼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으며, 순결한 한 처녀가 어디까지 타락하게 되고 그리고 남자가 감당해야 할 도덕적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번민하는 이야기쯤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 갓 공무원을 시작할 무렵 우연히 부활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때의 부활은 전혀 다른 측면에서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거나, 또는 일상적 삶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유배를 가는 길에 일사병이나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어도 소위 공인이라 칭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책임을 지는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배심원들은 사소한 실수를 한 것이고, 재판장과 판사는 배심원의 결정에 따른 것이고, 도지사와 검사, 의사는 자기 관점으로 유배를 보내도 좋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경찰, 헌병, 호송관, 교도관 등의 공무원들은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고.....


 죽어간 죄수를 포함한 빈민들의 피땀과노동을 착취하여 만들어진 세금으로 녹을 먹는 자들 모두가 자신은 자기 직분에 충실하며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뜻하지 않게 죽은 사람들이 귀찮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실에 놀랍고 혹시 나도 그런 몰염치한 공무원에 해당되지 않는가하고 반문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은 물과 같은 존재로 물 그 자체로는 같으나 빨리 흐르기도 천천히 흐르기도, 때로는 차기도 때로는 따뜻하기도, 어느 날은 흐리기도 어느 날은 맑기도 한 존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인간일지라도 처해진 환경에 따라 잔인해지기도 하고 인자해지기도 하며, 부유층의 고상함이나 빈민층의 무지함이나 범죄자의 잔인함이나 모두가 인간이기에 처한 환경에 따라 그렇게 변할 뿐이라 하며 인간에 대한 회의와 연민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또한 법률이니 제도니 하는 것들은 대지주나 귀족 세력들 소수가 농사를 짓는 다수의 농민들이 골고루 가져야 할 땅을 독차지 하여 경계와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든 지극히 불공정한 룰이고,
 법의 심판이라는 것도 굶주려서 죽을 것만 같은 빈민들이 죽음 면키 위해 그 경계를 넘는 불가피한 생존행위를 징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며,
 그러므로 죄를 지은 당사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빈민들이 굶어 죽도록 방치하는 기득권자들이지 생존을 위해 경계를 침범하는 굶주린 빈민들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종교적 행위에 대해서도 예수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것이 예수의 살이고 피라는 따위의 주술적인 행동을 금했으며, 교회당 자체를 금하고 자기는 제단을 헐어버리기 위해 왔으며, 교회 안에서 요란한 기도를 하기보다는 혼자서 진리 속에서 기도를 하며, 남을 재판하고 구속하기보다는 구속된 자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주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예수의 뜻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를 포함한 교인들은 구속된 자들을 해방시켜주기는커녕 가난한 자들의 피와 땀으로 빚은 술과 빵을 가지고 온갖 주술과 위선으로 재판과 구속을 합리화시키고 공고화시켜준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가 이번에 특별히 새롭게 느낀 점은,
 첫째, 오늘날의 빈부의 격차와 시대상황 흐름이 왠지 그때와 판박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빈민구제를 위해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농노제도를 폐지하는 사회운동을 하면서 부인과의 불화로 가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이미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는데 감각이 예민한 톨스토이와 같은 사람이 이를 감지하고 앞장서 실천에 옮긴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독한 빈부격차 ⇒ 사회주의 혁명. 
 지독한 빈부격차 ⇒ 미국 월가의 데모.

 

 

-배내골의 여름과 지금의 풍경입니다.

  감나무의 감이 노랗게 익어갑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대목은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우월한 자본주의 극치의 미국 월가에서 99%의 데모가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발전의 열기가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빙하를 녹이듯 자본주의의 빈부격차가 결국 기득권의 빙하를 녹일 수도 있다는 예감?????

 

 둘째,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 그 자체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으며, 또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본래 자연 상태의 대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대지는 비가 오면 비에 젖고, 해가 나면 햇볕을 받으면서 자신의 품고 있는 자양분으로 온갖 식물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간 역시도 그 본성에는 연민과 자비심 또는 동정심과 같은 선한 심성이 있어 남의 아픔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보듬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옥한 대지일지라도 그 위에 아스팔트 포장을 하고 나면 그 곳에는 생명이 자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을 보호하는 직책이나 직위에 포장되고 나면 선한 심성을 지닌 본연의 인간성은 잃어버리고 오직 직위와 직책이 그 사람을 대신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묻혀버립니다.
 나아가서는 그 직위와 직책을 지키기 위해서 선량한 양심을 버리는 것도 모자라 공정성이니 공공성이니 하는 무기로 인간의 본성을 위선덩어리로 더욱더 견고하게 포장해 버립니다. 

 내가 요즘 창원시청 직원과 창원교육청 공무원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바는 이런 직위와 직책의 포장을 지키느라 자신을  인간이기보다는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측은한 생각도 듭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조직의 부속품이라니...

 

-펜션 텃밭에 심은 배추가 자연의 힘에 이끌려 나날이 자랍니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쓴 19세기나 지금의 21세기나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끝없고 어리석은 욕망과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인간적 갈등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보면서 한 번쯤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본성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공무원을 막 시작할 무렵 직속상관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홍기사, 건축허가 업무가 네한테는 매일 몇 건씩 처리하는 늘상의 업무이지만 민원인 입장에서 보면 평생에 한 번 짓는 집이다.
 그 사람이 집터를 고르고 사는데 얼마나 고민을 하였으며, 또 그 돈을 장만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냐? 그리고 등기를 하고 각종구비서류를 완비하여 네 앞에 건축허가신청서가 접수되기까지는 숫한 우여곡절을 거쳐 마지막으로 네한테 왔다. 그런데 네가 어줍짢은 사유로 쉽사리 반려처분 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끄지는 심경일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항상 그 민원인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라.”라는 주문을 종종 하였습니다.

 

 

-추석날 아버지 산소에서 찍은 고향 바다풍경입니다. 

  내가 놀던 남해 지족마을인데 참 아름답죠. 

 

 

 요 며칠간 내가 겪은 공무원들의 모습이 부활에 나오는 공무원들과 너무나 흡사하여 이 책을 몇 부 사서 공무원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요즘 인기절정에 있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 여인을 만나느라고 혹여 카튜사와 같은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유명한 남해의 죽방렴 체험장입니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초입에 배내골 에코펜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