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길을 걷다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만큼 갔는지, 눈앞을 지나는 개가 있었는지, 귓전을 울리는 풍경소리가 있었는지를 모른다.
강당에 앉아 강의를 듣는 학생이 어제 패한 당구 게임을 생각하거나 점심 때 식당에서 마주친 여학생을 생각하고 있으면 흑판의 글자가 보이지 않고 스피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렇듯 무심코 또는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면 상대의 형상이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듯이,
내가 나를 지금까지 무심코 보아온 탓에 정작 나라는 존재에 대해 깨닫고 살아온 것 같지를 않다.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나’는 남이 부러워하는 직위에 있는 사람, 늘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정도의 부를 가진 사람, 만 사람이 다 선망하고 존경하는 지식과 인격을 갖춘 사람...
등등 정도였다.
상상으로 나는 대통령도 되어보고, 삼성회장도 되어보고, 조계종의 종정도 되어본다.
속가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계의 종정이나 교황을 보면 그저 상징적 존재로 별 탐탁찮게 보인다.
반대로 종교인이 바라보는 대통령의 직위는 기껏해야 5년의 임기동안 온갖 권모술수와 쟁투로 끝나고 말 것을 그토록 목매달아 하는지, 그리고 부자들은 죽고 나면 한 줌 흙도 가져가지 못하는데 왜 그토록 모으려고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수억 겁의 세월동안 이 같이 부질없는 짓을 수도 없이 반복해 가고 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 지혜의 대명사인 솔로몬왕이 있다 한들 내 인생과 관련하여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나는 욕망과 선망에 끄달려 다니는 나가 아니라 스스로 존귀한 나여야 한다.
스스로 존귀한 ‘나’
그러면 나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인간이 의도적으로 배우고 익힌 의지와 지혜와 작디작은 깨알 하나가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지와 지혜를 비교해 보자.
내가 아무리 의지가 굳다한 들 깨알이 수억 겁의 세월동안 자신의 조상의 모습과 습생을 잃지 않고 지켜온 그 의지만 하겠는가?
내가 아무리 지혜를 배우고 익힌다 한들 깨알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억하고 지키면서 온도, 습도, 토양, 바람 등 자신을 둘러싼 온갖 조건을 파악하여 싹을 틔우고 줄기와 잎을 키워 열매를 맺는 지혜를 따를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인위적으로 익힌 의지가 아무리 굳세다 해도,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해도 우주의 원리와 자연의 이치에 비하면 참으로 깨알의 우주 속에서 또 깨알과 같은 원리와 이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깨알만도 못한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 깨알만도 못한 존재다.
적어도 ‘참 나’가 아닌 끄달려다니는 존재 ‘나’로 사는 한은 깨알만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이나 선망으로부터 해방된 참 ‘나’라는 인간의 존재는 덩치로 보나 지혜로 보나 깨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욕망과 선망에 집착하여 깨알보다 못한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나’를 찾아야 한다.
누구를 위한 내가 아닌 절대 존귀한 ‘나’를 찾아야 한다.
"天上天下唯我獨尊"
-2013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 산길을 걷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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